나의 이야기 45

별동선조

■ 윤상(尹祥, 1373~1455) 본관은 예천(醴泉)이고 초명은 윤철(尹哲)이다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으로 윤충(尹忠)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의 윤신단(尹臣端)이다. 아버지는 예천군의 향리인 윤선(尹善)이다.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 시험으로 양반 신분에 올랐다. 향리 일을 하면서도 퇴식(退食)을 오갈 때 솔기름을 가져다 몰래 숨겨두었다가 밤에 책을 읽을 때 썼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 역성혁명을 반대해 예천에 유배되어오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杠) 등과 함께 수업해 문인이 되었다. 그해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해 선..

나의 이야기 2023.03.16

예천윤씨(2021 .11 .1)

예천윤씨시조(醴泉尹氏),윤충(尹忠),예천윤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27 14:56 수정일 : 2018-04-10 16:28 인쇄 메일 스크랩 예천윤씨의 연원(醴泉尹氏의 淵源) 예천윤씨(醴泉尹氏)는 원래 파평윤씨(坡平尹氏)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하나 고려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때부터 세계(世系)가 묘연(杳然)하고 근원(根源)을 알지 못하면서 내려 오다가 문정공(文貞公) 별동(別洞) 휘(諱) 상(祥)이 1373년(고려 공민왕22년) 경상북도 예천고을 서쪽별골 나들이(醴泉 西別洞)에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철(哲)이고 자(字)는 실부(實夫)이며 송정(松亭) 조용(趙庸)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질(資質)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서(生有美質聰悟逈出) 4,5세 때부터 여러가지 ..

나의 이야기 2021.11.01

묘갈명(2020 .4 .3)

別洞 醴泉尹公(祥) 墓碣銘 내용 별동 예천윤공(상) 묘갈명내가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문집을 보았는데 별동 윤선생의 문집 서문 한 편이 있어서 우러러 아름다운 음성과 맑은 향기를 마시게 되었다. 또 몇 해가 지나서 그 분의 손자인 신경의 아들(莘耕之子)은 선비로서 이름이 창문(昌文)인데 소매에 태두남(太斗南) 사문(斯文)이 지은 세계(世系)를 넣어 가지고 와서 선생의 묘비문을 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생의 아름다운 품행과 청렴하신 덕망은 이미 국사에 실려 있고 또 훌륭하신 문장은 의심 없이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못난 나도 후학(後學)으로서 무무한 시골 구석의 문사(文詞)인지라 학술이 보잘 것 없는데도 큰 붓을 들고 현명하신 덕망을 기록을 하니 마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황제의 위덕을 ..

나의 이야기 2020.04.03

운양집(2020 .4 .3)

운양집 제13권 행장(행장) 부(부) 가장(가상) 행록(행록) 모두 11편인데 9편을 수록하였다. 증 좌찬성 별동 윤공 행장〔증좌찬성별동윤공행상〕 선생의 휘(휘)는 상(상), 자는 실부(실부), 호는 별동(별동)이며, 초명(초명)은 철(철)이다. 그 선조는 예천군 사람이다. 증조부 휘 충(충)은 예빈시 소윤(예빈사소윤)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신서(신서)는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선(선)은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집안이 대대로 한미(한미)하여 향리에 드러난 가문이 아니었으나, 참판공의 성격은 공손하고 신중하며 덕을 좋아하여 늘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공수(공수)하며 경의를 표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어르신이라 일컬었다. 선생은 홍무(홍무) 6년(1373) 계축 10월 10일..

나의 이야기 2020.04.03

소나기 오든날(2020 .3 .14)

김수형 2013년 2월 16일 오후 06:04 게시글 설정 변경 친구신청 옛날 이야기 - 2 // 3부 그날 저녁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 선비가 주막에 찾아들었다. 비는 내리고 날은 저물었으니 하룻밤 묶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막 안으로 들어 밥상을 받으니 비가 그쳤다. 그집에 키우던 닭들과 거위가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고 우리에 있다가 비가 그치자 마당으로 나가 돌아다녔다. 주인집 손자로 보이는 어린 아이도 뒤뚱거리며 마당을 걸어다녔다. 선비는 밥을 먹으며 그 한가로운 모습이 보기 좋아 마냥 바라보는데 아이의 손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하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손에서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구슬이었다. 구슬이 떨어지자 마자 거위는 그것을 먹이로 잘못알고 주워먹어버렸다. 집 주인은 ..

나의 이야기 2020.03.14

[스크랩] 별동집속집발(別洞集續集跋)(2016 .12 .27)

별동집속집발(別洞集續集跋) 유도헌(柳道獻) 別洞先生續集成하니 蓋遺文之散出於諸家而裒而刊者也라 詩若干首와 箋表附錄數編而已라 先生未嘗論著하여 元集一冊이 僅出於知縣公所輯하니 其何以得先生之萬一哉리오 然先生道學文章之盛은 一時記載者가 未嘗乏也요 模範牖迪之訓은 後人誦慕者가 未嘗忘也니 更何以他求哉리오 별동선생의 속집이 완성되었으니, 이는 여러 사람들의 글 여기저기에서 나온 공의 유문(遺文)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약간의 시와 전문(箋文)·표문(表文)·부록 몇 편에 불과하다. 선생이 평소 논저를 남기지 않아 원집(元集) 한 책도 지현공(知縣公)이 수집한 글들로 겨우 만들어졌으니, 어찌 이를 통해 선생의 진면목을 약간이라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훌륭한 도학과 문장은 당시에 끊임없이 언급되었고, 길을 열어주고 모범..

나의 이야기 2016.12.27

[스크랩] 조선초기 신 유학의 정착(2016 .12 .17)

" 조선의 건국은 왕조의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통치이념이 불교로부터 유교로 교체된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였다. 유교로 정교의 근본을 삼고, 유신들을 등용하였다. 조선의 개국에 즈음하여 가장 영향을 끼친 유학자로 살필 이가 정도전이다. 그는 봉화 사람으로 매우 명민하면서 호기가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군서(群書)를 박람, 자칭 문무의 재가 있다고 자부하였다. 조선이 개국할 때 그는 이성계의 가장 가까운 참모로서 이성계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조선의 개국 이후 그는 개국일등공신이 되고, 여러 요직을 겸임하였는데, 특히 치국의 지도이념을 정립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국전(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제진하여 유교주의에 의한 경제치민의 도를 주장하였다. 그는 ..

나의 이야기 2016.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