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조선초기 신 유학의 정착(2016 .12 .17)

장수골 2016. 12.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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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건국은 왕조의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통치이념이 불교로부터 유교로 교체된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였다. 유교로 정교의 근본을 삼고, 유신들을 등용하였다.
조선의 개국에 즈음하여 가장 영향을 끼친 유학자로 살필 이가 정도전이다. 그는 봉화 사람으로 매우 명민하면서 호기가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군서(群書)를 박람, 자칭 문무의 재가 있다고 자부하였다. 조선이 개국할 때 그는 이성계의 가장 가까운 참모로서 이성계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조선의 개국 이후 그는 개국일등공신이 되고, 여러 요직을 겸임하였는데, 특히 치국의 지도이념을 정립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국전(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제진하여 유교주의에 의한 경제치민의 도를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을 주도한 정치가이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였다.
그러나 태조 7년(1398)에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 일파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정안군에게 참살 당하였다. 그의 저술은 일부만이 『삼봉집(三峯集)』 14권에 실려서 전한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저술 『심기리편(心氣理篇)』과 『심문천답(心問天答)』은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가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사상을 전하는 자료로서 『불씨잡변(佛氏雜辯)』이 있다. 이것은 그의 만년에 지은 대작인데, 불가의 윤회설 등 14조목에 걸쳐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한 것이다. 이밖에도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가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권근은 이색의 문인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에 벼슬하였고, 이성계 일파에 의해 배척을 받아 충주에서 지내던 중 조선의 개국을 맞이하였다. 이후 조선왕조에 출사하였는데, 뒷날 대제학에 오르는 등 문한(文翰)의 직을 오래 맡아 경국(經國)ㆍ외교에 관한 글을 지었다. 대표적인 저술로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동국사략(東國史略)』, 『오경구결(五經口訣)』이 있다. 이 중에 『입학도설』과 『예기천견록』이 유명한데, 『입학도설』은 초학자들을 위해 성리학의 오의를 도설로 요약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많이 남긴 도설의 비조격이 된다. 그 중 제일도인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과 주자 『중용장구』의 학설을 토대로 하여 인간 심성과 이기, 선악의 관계를 분석 종합하여 정주학의 본령인 천인합일의 요령을 설명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권근은 적지 않은 문도를 배출하여 개국 이후 학계와 정계에 기여한 이들이 많았다. 권우(權遇), 변계량(卞季良),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김반(金泮)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태종, 세종 시대의 명신으로 조선 초기 문화에 공헌한 것이 많다.
길재(1353~1419)는 권근과 같은 시대의 학자로서 그 문하에 출입하였지만, 그 학풍과 절의는 권근과 달랐다. 그는 정몽주에게 배우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연원은 정몽주에 두기도 한다. 길재는 호가 야은(冶隱)으로 선산 금오산 아래에 살았다. 33세인 우왕 12년에 문과에 급제, 뒤에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국가가 위태로울 것을 예견하고, 낙향하였다. 조선의 건국 뒤에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독서 함양에 진력하며 후생을 교육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신절(信節)을 지켜 풍교를 세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글을 보내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길재는 향리에서 사숙을 열고 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실천을 중시하여 효제, 충신, 예의, 염치를 앞세웠다. 사람의 언행이 낮에 착오가 있는 이유는 밤에 존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밤이면 늘 정좌하여 마음을 검속한 뒤에 밤중에야 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새벽이면 관대를 갖추어 정장을 하고 사당과 선성(先聖)에 먼저 예를 올렸다. 상제례에는 오로지 『주자가례』만을 따르고 불교의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공리와 영욕을 초탈하고, 절의를 생명처럼 지켜 산림에 은거하면서 진지(眞知)와 실득(實得)으로 후생의 훈도를 주의로 삼았다. 이러한 그의 기상이 조선의 성리학파에 끼친 영향이 크다. 앞의 권근이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잡았다면, 길재는 그 정신과 뼈대를 구축한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그의 학맥은 그 제자들에게 이어져 조선시대 사림파의 연원을 열었다.
길재의 문도는 영남인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표로는 조용(趙庸)과 김숙자(金叔滋)가 있는데, 예천 사람인 조용은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국학의 장을 20여년이나 맡았다. 이에 비하여 김숙자는 세종 조에 일시 출사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밀양에 은거하며 후진을 가르쳤다. 그는 늘 소학을 갖고 애친(愛親), 경장(敬長), 융사(隆師), 친우의 도를 실천할 것을 가르친 뒤에 경전을 강습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계승되었고, 김종직의 문도가 매우 많아 사림의 융성시대를 이루게 된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위(曺偉), 김일손(金馹孫), 표연말(表沿沫), 이종준(李宗準), 손중돈(孫仲暾) 등이 대표적이다. 길재와 김숙자는 산림에 은거하여 현실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김종직과 그 문도들은 모두 조야에서 활약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들이 권근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을 이룬 훈구파와 쌍벽을 이룬 사림파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그 아들 태종은 모두 유교를 장려한 군주였다. 태조는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첩제를 실시, 허가 없이는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고, 사원의 지나친 건설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유교를 장려하여 도성과 지방의 학교를 보수하고 과거를 실시하였으며, 가묘 제도를 장려하였다. 태종은 즉위 후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도성 안에 설치하였고, 성균관에 친림하여 직접 선비들을 시험하여 선발하기도 하였다. 또 주자소(鑄字所) 설치를 명하여 서적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는 물론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치적을 남긴 군주는 태종을 계승한 세종이다. 동왕 2년 집현전을 설치, 학사들을 선발하여 학문에 전념케 하고, 함께 고금의 치적을 토론하는 한편, 서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세종 자신도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고 제자백가서도 두루 보았다. 그 중에도 경세제민의 학문을 위주로 하여 모든 정치를 유교적 규범에 기준을 두었다.
세종은 서적의 편찬, 간행과 간의, 혼천의,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기구 제작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훈민정음, 즉 오늘의 한글을 창제한 공로는 우리민족문화에 가장 찬란한 업적으로 남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편찬한 서적은 『치평요람(治平要覽)』『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역상집(曆象集)』,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은 유교 윤리에 관한 책으로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밖에 『사서언해』가 있어 후일 언해의 효시가 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세종은 유신을 시켜 『소학』과 『사서』, 『오경』 등의 구결을 정하였고, 『사서』의 언역을 꾀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이가 조용의 문인으로서 역시 예천 사람인 윤상(尹祥)이다. 그는 대사성으로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문교가 크게 성하였다. 이 구결, 언역 작업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주설을 위주로 하여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 앞서 세종은 명에 사신을 보내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등을 중국에서 구해 왔는데, 이 책들은 명의 성조가 유신을 시켜 정주학설을 정리한 것이다.
세종의 치적에 버금가는 이는 9대 임금인 성종이다. 그는 세조 이후 일시 숭불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불교를 억압하였다. 그는 매양 유신들과 함께 경의를 강론하고 자주 성균관에 행차하였다. 성균관에 존경각을 건립하였고 고려시대에 있었던 양현고를 부활하였다. 세조 때에 폐지하였던 집현전의 기능을 강화한 홍문관을 설치하였다. 또 독서당을 만들어 문신들을 선발하여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를 호당이라고 한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 『악학궤범(樂學軌範)』, 『두시언해(杜詩諺解)』 등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학문을 장려하고 사림을 배양하여 어진 선비를 등용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문물제도는 성종 대에 완비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교는 국학인 성균관과 사학이 서울에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지방에는 또 요즘의 사립학교라고 할 서당이 있었으나, 정규적인 체계가 아닌 소규모의 서숙이었다.
태조는 개국한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하고 동왕 6년에 성균관을 세웠다.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에 시작한 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다. 관내에는 공자를 향사하는 문묘 대성전과 강학장소인 명륜당이 있다. 문묘의 좌우에는 동ㆍ서무(東ㆍ西廡)가 있어 선현의 제사를 지냈고, 명륜당의 좌우에는 동서재를 두어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학생의 정원은 200명인데, 주로 소과 출신인 생원ㆍ진사가 입학하였다. 학과는 경술과 문학이 주 내용이었고, 정주학 위주였다. 사서오경의 학습을 마친 자가 학관의 시험을 거친 뒤에 졸업하였는데, 그들에게 문과 복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향교는 지방관이 파견되는 각 고을에 하나씩 있었다. 이 역시 고려의 향교를 그대로 따른 것인데, 향교에도 문묘와 명륜당, 동서재를 설치하였다. 교수와 훈도 1인씩을 두었고, 정원은 큰 고을은 70내지 90명, 작은 고을은 30내지 50명이었다. 각도의 관찰사는 도내의 교생을 선발하여 매년 6월에 문관 3인을 시켜 강경 또는 제술(製述)로 우등자를 선발하였고, 이들을 중앙에 보내 생원 진사 복시에 응시케 하였다.
출처 : 옛.생활문화연구소/문화탐방단
글쓴이 : 청산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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