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 2 // 3부
그날 저녁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 선비가 주막에 찾아들었다. 비는 내리고 날은 저물었으니 하룻밤 묶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막 안으로 들어 밥상을 받으니 비가 그쳤다. 그집에 키우던 닭들과 거위가 비 그치기를 기다리다고 우리에 있다가 비가 그치자 마당으로 나가 돌아다녔다. 주인집 손자로 보이는 어린 아이도 뒤뚱거리며 마당을 걸어다녔다. 선비는 밥을 먹으며 그 한가로운 모습이 보기 좋아 마냥 바라보는데 아이의 손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하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손에서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구슬이었다. 구슬이 떨어지자 마자 거위는 그것을 먹이로 잘못알고 주워먹어버렸다.
집 주인은 나그네인 선비를 의심하고 동네사람들을 불러 밧줄로 묶어 관아에 데려가려했다. 선비는 거위와 자신을 같이 묶어두면 내일 아침 틀림없이 구슬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선비 옆에 묶여 있던 거위똥에서 진주구슬이 발견되어 선비는 오해를 풀게되었다. 선비는 팔의 옷을 걷어올려 묶인 자리를 확인했다. 간밤동안 묶여있던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밧줄 모양대로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주인이 미안한 마음에 사죄를 하며
"선비 양반 어제 말하면 될 것을 왜 하지 않았소?"
라고 하니
"급한 마음에 진주 구슬을 찾겠다고 거위를 죽일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의 목숨도 구할 것 아니요."
라고 했다. 집 주인은 감복하고 미안한 마음에 돈을 건넸으나 선비는 받아들지 않았고 아침 밥을 먹고 다시 주막집 문을 나섰다.
"선비 양반, 내 미안해서 그러오. 이 짚신과 주먹밥이라도 좀 받아 가시오. 먼길 가면 몇커리 필요할꺼요. 그리고 어디 사시는 뉘신지 이름이라도 좀 알려주오."
하며 통 사정을 했다. 할 수 없이 선비는 짚신과 주먹밥을 받으며
"예천 고을에 사는 윤상이라고 하오."
하고 말하고 가던 길을 갔다.
윤상의 아명은 철이었다. 가난한 평민의 집에서 태어나 양반이 되었으며 뒷날 문종에게 절을 받은 최고의 학자가 된 인물이다. 스승인 죽계(송정) 조용이 대사성으로 16년 있었고 제자인 별동 윤상도 대사성으로 16년 있었다. 조선의 선비 가운데 조용의 학맥을 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의 대학자였으나 오늘날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렸다.
포은 정몽주 - 죽계 조용 - 별동 윤상 - 강호산인 김숙자 - 점필재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학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훗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성균관 유생들이 시위를 하며 스승으로 다시 모셔야한다고 했으며 수차례 많은 대신들이 별동 윤상 선생이 교육을 맡아야한다고 왕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세손(왕의 손자)인 단종을 가르치게 되어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고마움에 절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리고 명종 22년(1567) 가을,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동방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아는 사람이 있는가?"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퇴계 이황선생이 고려의 우탁, 정몽주와 조선의 김굉필, 정여창, 윤상, 이언적, 서경덕의 7인을 적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요즘 같이 교육이 흔들리는 시대에 본 받을만한 두 스승 죽계 조용선생과 별동 윤상선생의 행적이 눈에 들어온다. 한나라의 교육의 책임자가 16년간 같은 정책을 펴고 그 제자가 다시 16년간 같은 정책을 폈다는 것도 대단하며 그 둘은 늘 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진흙 속에 진주를 찾아내었고 사람도 아닌 거위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는가?
별동선생은 조정에 계시면서도 스승인 죽계 조용선생을 닮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보면 불러 가르쳐 나라에 기둥으로 키워냈다고한다. 멘토가 필요한 요즘 시대에 우리가 그리는 멘토가 이 두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