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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南人)와 기호학파(老論) 와의 관계
조선조 500여년간 정치, 사상, 학문,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을 주도해 온 영남학파 영남학맥은 유학중심의 학맥을 완고히 하고 형식적인 병폐가 있기는 하나 아직도 한국인에게는 도의적인 최후의 보루일인 만큼 유학의 가르침은 우리 사회에서 학문 이기에 앞서 생활 의식속에 뿌리박힌 기조이다.
이씨왕조 건설에 적극 가담한 정도전, 권근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들이 벌리는 그들만의 국가운영 방식이 왕위계승 대대로 이어져야 한다는게 훈구파의 이다. 여기에 맛서서 고려 왕통을 고수하려는 정몽주, 이색, 이승인, 길재 등 충신 유학자들은 불사이군 의 절의파로 사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영남학파가 서서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자 기성 관료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무오, 갑자 사화가 유발되자 사림파 세력들은 다소 주춤하는듯 했다.그러나 영남사림파 세력은 꾸준히 자기 성장을 계속하여 조광조, 김안국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같은 사림파 계열의 이언적과 김안국의 기반위에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 이황이 나타나 거대한 학맥의 기반인 영남학파를 조성 해 훈구파 세력의 부정과 퇴폐한 사상에 맛서 영남학파는 과감히 이에 맛서 대결 하기도 했다. 때를 같이하여 이황의 '주이론'에 맛서 거의 동시 이이의 출현이다.(이황보다 30여년 후진) 이황은 이미 영남의 성리학자 대 선구자 이언적의 학문적 사상을 그대로 이어 받은 '이론적 학문'인 반면 이이는 경기도 출신 이었으며 그의 학문을 따르는 학자들이 주로 경기도, 충호남에 많았으므로 이를 '기호학파'라 하였다.
이황이나 이이가 생존 하였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학파와 문벌의 차이와 노소, 신구의 충돌로 '동인' '서인 '의 두당이 나뉘어졌다. 대체로 동인은 영남학파 소속의 학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서인은 거의가 기호학파와 이이와 관계를 가졌다. 그후 동인은 다시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다시 분파되어 대립이 반복 되었다
조선후기 200년 동안 승리한 당파는 기호에 기반을 둔 노론이다. 기호학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정권투쟁에 패해서 지방으로 몰린 당파는 영남지방에 근거를 둔 남인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도 산촌에서 대략 200년 동안 고픈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했다. 조선후기 세도정치는 영남사람이 누린게 아니라 서울 장동에 살던 장동김씨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조선 후기는 경상도 사람들이 지역 차별과 정치적 소외를 받았던 역사다.
안동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이 퇴계 선생의 진성(眞城) 이씨 집안, 서애 유성룡의 풍산(豊山) 유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義城) 김씨 집안이다. 의성 김씨 학봉파(鶴峯派) 후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 숙종 이후 이 집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한 것이 ‘참의(參議)’라고 한다. 지금의 차관보(次官補)에 해당한다. 정부 중앙부처 1급 국장급이다. 영남에선 참의 벼슬이
대부분의 영남 선비들은 평생 벼슬을 못하고 강호의 처사(處士)로 인생을 끝냈다. 그러니 얼마나 원망이 많았겠는가. 능력이 아니라 출신지역 때문에 당한 불합리한 차별이었다.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경상도의 남인이 철저하게 견제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는 지역차별의 정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차별 기간이 대략 200년이다. 근래 호남차별이 35년이라면, 조선후기 영남차별은 200년이다.
쥔 ‘장권력 김’, 안동에선 ‘왕따’
“안동 김씨 집안은 안동에서 대략 두 지역에 나뉘어 산다. 하나는 안동에서 영천 쪽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길안면 묵계리다. 산수가 아름다운 묵계리에는 묵계서원(默溪書院)과 만휴정(晩休亭)이 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 무오사화를 겪은 후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안동에 내려와 살던 곳이다. 보백당은 청렴결백해 안동의 청렴한 선비상을 정립한 인물이다. 만휴정은 보백당이 죽으면서 남긴 유훈으로 유명하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라는 편액이 그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은 오로지 청백뿐이다’는 정신이다. 보백당의 후손은 대대로 향리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소박하게 살았다. 안동 김씨라 해도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권력과는 별 관련이 없다.
벼슬을 많이 한 쪽은 소산(素山)에 살던 안동 김씨다. 종가인 ‘양소당(養素堂)’과 풍산 들판이 바라다보이는 ‘삼구정(三龜亭)’이 있는 곳이다. 바로 이 소산에서 안동 김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청음 김상헌이 태어났다. 서울 장동(지금의 효자동부근)에 살던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세도의 뿌리가 소산이다. 비록 서울에 살기는 했지만, 문중 행사가 있으면 서울의 장김(장동에 사는 안동김씨)들이 이쪽 안동 소산에 내려오곤 했다. 정조대의 풍산홍씨에서 시작되어 안동김씨, 풍양조씨,여흥민씨로 이어지는 세도가 국가를 사영한 끝에 주인없는나라 만들어 끝내 5천년역사에 처움 나라 잃은 치욕을 가져 왔다. 김상헌의 충절과 방랑시인 김삿갓의 풍자문학,김옥균의 개혁이상, 김좌진의 항일투쟁 등은 후세에 자랑거리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안동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인이 지배했다. 퇴계 선생의 문하가 모두 남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노론이던 소산의 안동 김씨들은 안동 사람들과 따로 놀 수밖에 없었다. 당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의 권력은 장김들이 잡고 있었지만, 고향인 안동에 와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서울과 연계돼 있었기 때문에 소산의 김씨들이 중앙정부와 연줄이 닿는 실세이긴 했지만 안동 전체 분위기에서는 ‘왕따’ 당하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산의 김씨들이 서원을 건립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영조 즉위 4년 만인 1728년에 이인좌의 난, 즉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했고 여기에 영남의 남인 집안이 상당수 개입했다. 즉 경상우도인 경남지역의 남인들은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노론이 옹립한 영조를 부정했고 그 부정이 무신란으로 발발했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조정에서는 경상좌도인 경북 안동 일대의 민심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이 무렵 소산의 김씨들은 안동 시내에 청음 김상헌을 기념하는 서원을 세우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거의 완공되어 기왓장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안동의 유림이 ‘이를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안동 일대의 거의 모든 유림이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마침내 영남 유림이 합세해 서원의 기둥에다 밧줄을 묶고 말을 동원해 끌어당겼다. 이는 지금까지도 안동의 식자층 사이에 회자될 만큼 함축적인 사건이다. 안동 김씨와 영남 유림의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이었다. 결국 ‘장김’쪽에서 서원을 세우지 못했다.”
노론정권과 남인의 영남(안동) 유림은 날카롭게 대립하다.
안동의 유림이 정권에 거세게 저항하니까, 대원군 시절인 1891년에는 김가진(金嘉鎭·1846~1922)이라는 인물을 안동부사로 파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가진은 장김이었다. 당시 서울의 장김들 중에서 가장 명석하고 강단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능력 있는 인물을 문제 지역인 안동으로 내려보낸 목적은 두 가지인 것으로 전한다. 하나는 남인의 아지트인 안동 유림을 제압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당시 안동의 명문가인 유성룡 집안과 김성일 집안을 추종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병호시비(屛虎是非)’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가진은 결국 두 가지 문제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만큼 노론정권에 대한 안동 유림의 결속력과 저항의식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가진은 서울에 돌아와 임금에게 ‘천김쟁쟁 하류청청(川金錚錚 河柳靑靑)’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내 앞(川前)에 사는 의성 김씨들은 쇳소리처럼 쟁쟁하고, 하회에 사는 풍산 유씨들은 푸른 솔처럼 청청하다’는 내용이다.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영남의 남인들이 정권에서 소외된 시기는 몇 단계로 볼 수 있다. 거시적으로는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사부이던 정인홍도 죽임을 당한다. 정인홍은 경상우도인 경남 출신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 일이 영남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분기점이 된다. 그 다음이 숙종 때인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이때 남인의 영의정이던 허적(許積·1610∼80)이 사약을 받으면서 남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음이 1694년 장희빈과 관련되어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때부터 서애 유성룡의 후손인 매산(梅山) 유후조(柳厚祚·1798∼1876)가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경상도 남인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물론 정조 때 번암 채제공과 같은 남인계 영의정이 배출됐기는 했지만 채제공은 근기(近畿) 남인으로, 경상도 남인은 아니었다. 근기 남인은 간혹 채용됐지만 경상도 남인은 철저히 배제됐다. 영조 4년인 1728년 발생한 무신란은 바로 이런 경상도 남인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하지만 무신란으로 인해 영남은 더욱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대구에 세운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이를 대변한다. 경상좌우도를 놓고 보면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도(경남)가 좌도보다 훨씬 더 천대받았다. 아무튼 유성룡 이래로 영남 출신이 재상에 오른 사례는 유후조가 유일하다.
경신대출척부터 유후조가 좌의정에 오른 시기까지를 계산하면 대략 200년이다. 200년 동안 지역차별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200년 동안 뭉친 영남의 한을 풀어준 사람이 박정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통이 집권하면서 전라도 차별이 시작됐다. 한을 푸는 것은 좋았는데 그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것이다. 서울과 근기 노론에 향해야 할 불똥이 전라도로 튄 게 아닌가 싶다. 전라도에는 노론 집안도 물론 있었지만 남인 집안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남(海南) 윤씨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집안이 남인이었고, 전라도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한 도시라 역대로 부자가 많이 살았던 나주가 전라도 남인의 근거지였다.
참조문헌; 趙龍憲 원광대 초빙교수 '노론(老論),남인(南人)... 보학연구의 참고' 작성자 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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