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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동김씨와 소산마을[펌](2016 .7 .28)

장수골 2016. 7. 2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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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와 소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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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동 김씨의 서울 정착과정
 
 

가) 말머리
조선 후기 세도 정치를 했던 안동 김씨들을 우리는 장동김씨 또는 안동김씨 장동파라고 부른다. 안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로 60여년간 권력을 향유하였다고 하여 마치 안동사람들 모두가 세도정치로 권세를 누렸던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해는 모두 안동 김씨 장동파가 있었기에 연유된 것이며 그 장동파의 근원을 살펴봄으로써 세도정치와 안동과의 관계 또한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장동파는 붕당에 있어서 노론에 속하였으며 안동의 대부분 가문들은 남인 혹은 소론에 속하였다. 일부 노론 집안들이 있긴 하지만 역시 안동의 주류는 남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안동 사람들은 권력의 핵심에 들 수 없었으며 소외된 재야 세력에 불과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아갔지만 권력의 핵심과는 여전히 먼 거리에 존재할 뿐이었다. 불과 얼마 전 우리는 TK정서라는 말을 많이 하였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대구 경북지방의 정서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안동지방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권력의 핵심에서 권력을 향유한 것은 특정고교 출신들이었으며 안동은 TK의 주변일 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도정치는 안동 출신의 서울사람들이 주도했던 정치였으며 안동사람들의 몫은 아니었다.

나) 안동 김씨 장동파의 서울 정착
안동 김씨가 처음 서울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소산 마을의 입향조인 김삼근(비안공)의 맏아들인 계권이 경직에 있을 때 장동에 터전을 잡은 것에서 연유한다. 계권이 터를 잡은 이래 그의 아들 3형제(영전, 영추, 영수)가 과거 또는 천거를 통해 과거에 나아가면서 정착되어져 갔다. 그 중에서도 영수의 아들 형제(영과 번)가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면서부터 장동에 확실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특히 영(瑛)은 20여 년 동안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풍계(淸楓溪)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생활하면서 그 터전을 확고히 하였다.
계권이 처음 터를 잡고 세 아들이 벼슬을 하면서 기반을 강화하면서 특히 두 손자가 이곳에서 벼슬을 하면서 대대로 살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확실한 지역적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겠다. 3대째 청풍계(장동)에서 세거해오다가 영의 손자 기보에 이르러 소산으로 낙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장동에 살던 안동 김씨들이 다시 낙향하여 소산에 기거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완전히 소산을 떠난 것은 대략 17세기 중엽이다. 청음 김상헌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항복문서를 찢고 척화를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단식으로 저항하였으나 그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소산으로 낙향하여 청원루에 기거하였는데 이때 세 손자를 데리고 와서 글을 가르쳤다. 청음 김상헌은 심양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청원루에서 기거하였는데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간 후 그의 부인이 청원루에서 돌아가심에 그의 맏아들 광찬이 세 아들과 더불어 장사지내고 서울로 돌아가니 그 해가 인조 20년인 1642년이었다. 이로서 장동파는 소산에서 아주 떠나게 되었다.

다) 장동파의 전성기
안동 김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린 것은 특히 김영수의 가계이다. 그의 두 아들인 영과 번의 후예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안동 김씨가 명문대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영의 후손들은 조상의 텃밭인 소산마을을 지키면서 꾸준히 벼슬길에 나아갔고 그래서 오늘의 소산이 있게 한 주역들이다. 그러나 번의 후손들은 주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이른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장동 김씨 또는 안동 김씨 장동파라고 할 때 바로 이들이 그 주역인 것이다.
일명 ‘청원루의 자손’이라 하고 또는 장동 김씨라고 불리기도 하며 특히 ‘금관자가 서말 나온 집안’이라는 말은 바로 번의 후예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청음 김상헌의 자손들의 벼슬길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전성기는 뭐니뭐니해도 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3대 60년 간의 세월이 가장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도정치가 가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청음 김상헌이라고 할 수 있다. 청음은 서인의 핵심인물이었던 윤근수의 제자로서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던 서인 즉 청서파의 영수가 되어 인조 즉위 후에 관직에 복귀하면서 온갖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청음은 관직으로서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을 통하여 성리학의 명분론에 충실함으로써 서인, 특히 청서파의 강력한 정신적 지주로서의 위치를 굳혔고 이것이 이후 안동 김씨들이 노론의 가장 강력한 리더로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 집권 이후에는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대원군이 외척을 타도하고자 하였으나 안동 김씨 세력을 모두 배척하지 못하고 김병학, 김병국 등을 영의정으로 내세워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역시 안동 김씨는 풍양 조씨와 함께 무시할 수 없었던 강력한 세력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화려한 출사를 정리해 보면 왕비가 셋, 임금의 사위가 둘, 영의정이 8, 좌ㆍ우의정이 7, 대제학 7, 제학 15, 부제학 16, 직제학 14, 관찰사가 46, 유수가 31명이나 배출되었다. 물론 이중에는 경직과 외직을 함께 한 이도 있어 중복이 있음도 있지만 한 가문에서 이만한 관직을 배출하였음을 어느 가문에서 찾을 수가 있겠는가?

번의 후예들(장동파)의 출사
①임금의 장인(3명)/◦김조순 : 영안부원군-순조의 장인 ◦김문근 : 영은부원군-철종의 장인 ◦김조근 : 영흥부원군-헌종의 장인 ②임금의 사위(2명)/◦김현근 : 순조부마(제1녀) ◦김병주 : 순조부마(제2녀) ③정승/◦영의정 : 김수항, 김수흥, 김창집, 김좌근, 김홍근, 김병시, 김병학, 김병국(8명) ◦좌의정 : 김상헌, 김이소, 김홍근, 김병덕(4명) ◦우의정 : 김상용, 김이교, 김달손(3명) ④문원/◦대제학: 7명 ◦제 학:15명 ◦부제학:16명 ◦직제학:14명 ⑤외직/◦관찰사:46명 ◦유 수:31명 ⑥묘정 배향(6명)/김상헌(효종묘), 김수항(현종묘), 김창집(영조묘) 김이교(순조묘), 김조순(정조묘), 김수근(철종묘) ⑦원ㆍ사에 배향된 인물(15명) ⑧시호를 받은 인물(49명) ⑨육조 판서를 지낸 인물이 51명에 이른다.
(이상의 통계는 안동김씨소산종회에서 발간한 “소산동의 연원”을 참고하였음.)

증직이나 기타의 경직과 외직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일 것이다. 오늘날 족보에서 증직이나 허직까지도 기록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들이 진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숫자의 관원을 배출한 가문인 것이다.

라) 맺으면서
세월의 흐름 속에 영욕이 교차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60년 세도 끝에 권력의 핵심에서 서서히 도태되어 가게 된 안동 김씨 장동파, 그들은 화려한 세월을 뒤로하고 세인들에게 나라를 망친 세도정치의 주역으로서의 인식을 벗어버릴 수 없게 되었다. 세도정치라고 하는 것이 또한 시대적 산물이기는 하겠으나 역사의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그들 또한 심판대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를 탓하고 앉아서 무슨 이득이 있으리오만은 그래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정자들의 역사관과 정치의식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백성들의 삶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세도정치이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 위정자들의 행태 또한 과거 세도정치 당시의 권력 투쟁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으니,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에 한탄이 절로 나옴은 기우인가?
화려한 권력의 모습에서 가문의 영광을 논하기보다는 오히려 청음 김상헌의 의식과 지조, 그리고 선원 김상용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본받는 자세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출처 : 강물 블로그
글쓴이 : 강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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