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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진짜와 가짜는 뒤섞여있기 십상이다 / 이익
2016.06.18. 06:31
http://blog.naver.com/rowkcn/220739392136
근거 없는 말을 믿고 임시변통하는 폐단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욱 심합니다. 비록 제멋대로 글을 지어 고인(古人)을 비방하는 자들과는 수준이 다르지만, 비난을 두려워 피하면서 시류(時流)에 따라 세상에 아첨하는 데서 오는 폐해는 더욱 심하니, 결국 경술(經術, 유학의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학문, 즉 성인의 말씀을 연구하는 학문)이 어두워지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한 세대에 제대로 된 학문이 없다면 이러한 부류가 학문을 창도(倡導 어떤 일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부르짖어 사람들을 이끌어 나감)할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미워하는 부류는 무엇보다도 향원(鄕愿)입니다. 옳은 것 같지만 실제는 그르고 행동이 모호한 자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심술(心術)의 적(賊)은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책을 저술하는 일은 초학자가 꺼려야 할 바이니, 외면에만 힘을 기울여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내달릴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하고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록하는 것이 모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공부이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본원의 학문은 발휘되어 도(道)를 실천하는 기초가 됩니다. 근세의 학자들은 조용히 물러나 사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는데,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기 십상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품은 바가 무엇인지를 관찰해 보면 모두가 실제에서 우러나온 학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떤 일을 당해서 제대로 처리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모범으로 삼을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저술하는 일은 무관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책이 완성되기를 나는 참으로 학수고대하였는데, 일찌감치 직접 시도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윤공(尹公)의 규모는 너무 협소합니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데는 충분하지만 사물을 성취시키는 데까지는 그의 뜻이 미치지 못하니, 머리가 세도록 경서(經書)를 탐구하더라도 기대할 수 있는 때가 언제나 오겠습니까?
《대학(大學)》의 8조목(條目)에서 아래의 반을 잘라 내고 취하지 않아서야 옳겠습니까?‘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이상의 수준에까지 이르려고 한다면 역사책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병을 조섭하는 여가에 이전의 성과를 잘 정리함으로써 우리나라 사람에게 혜택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옮긴이 주: 《대학의 3강령과 8조목》 [삼강령(三綱領)]: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新民),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 [8조목(八條目)]: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남헌(南軒)이 “술이 흥건해지자 기(氣)가 올라 슬픈 노래를 강개(慷慨)하게 불렀다.”라고 하였는데, 주 선생(朱先生 주희(朱熹))에게 이러한 습관이 있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또한 조금 기질(氣質)이 변화되지 않은 곳도 필시 있었을 것입니다.
나도 일찍이 이 편지를 보고서 성찰하고 극기하는 것의 어려움을 매번 탄식하였습니다. 대현(大賢)조차 이러한데 재주도 무디고 학식도 없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여동래(呂東萊)가 남헌을 위해 지은 제문(祭文)에는 “내가 천하를 돌아다닐 적에 나를 사랑하여 우매하다는 것조차 잊으셨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공에 못지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마음속에 돌이켜 볼 때 어찌 감히 공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공에게는 과감히 말하면서도 저 사람에게는 두려워하였던 것은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공은 부지런히 가르침을 구하기를 독실하고 정성스럽게 하여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미를 헤아려 보면, 이것이 주 선생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직하고 성실한 동래와 같은 사람도 간혹 두려워서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당시의 기상(氣像)을 알 만합니다. 나중에 주 선생이 여동래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그대의 글에서 ‘선(善)을 좇아 충고를 받아들이니, 충고를 하는 자로 하여금 할 말을 다 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것을 편협한 나한테도 베풀어서 경계되는 바가 더욱 많습니다. 평소에도 그〔渠〕의 이러한 행동을 알고서 공경하고 탄복하였으나, 능히 배우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대의 글’이라는 것은 여동래가 장남헌을 위해 지은 제문을 가리키고 ‘그〔渠〕’라는 것은 장남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합해 보아야 그 일이 비로소 사리에 맞게 됩니다. 윤공이 자신을 다스리는 데 독실한 점에 있어서는 고인 중에도 비견할 사람이 드뭅니다. 벗들이 서로 절차탁마하고 성실하게 충고하여 선도(善導)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대도 허심탄회하게 도움을 수용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 옛날의 우도(友道)가 공들로 인해 실추되지 않을 것입니다.
연경(燕京)에서 돌아온 사신이 가져온 산승(山僧)의 상소 한 편을 나도 보았는데,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정(嘉靖)을 만력(萬曆)이라고 하고, 천명(天命)을 천총(天聰)이라고 하고, 세조(世祖)를 태조(太祖)라고 하였으며, 17조(條)를 15건(件)이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시 상소가 임금의 앞에서 나왔다가 바로 불태워졌는데, 서리(胥吏)들이 기억해 두었다가 외인(外人)들에게 팔아먹은 것이어서 그 글투가 이렇게 허술한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 내용 중에 “능묘(陵墓)를 발굴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필시 재화와 보물로 오랑캐를 섬기기 위해 한 짓일 것입니다.
또한 “서쪽에서 땅을 잃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서쪽이라는 것은 하투(河套)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의 서달(西㺚)입니다. 송나라와 명나라 연간에는 서북쪽에서 전쟁이 많았습니다. 엄답(奄答)의 잔당들이 지금껏 창궐하여 해마다 정벌하였으나 대부분 패하였습니다. 옛날 부차(夫差)가 망한 것은 자주 싸워 자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주 싸우면 백성들이 피폐해지고, 자주 이기면 군주가 교만해집니다. 하물며 자주 패하는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재작년에는 요동(遼東)의 군대를 대규모로 발동하여 우리나라의 사행(使行)과 함께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믿을 만한 소식입니다. 요동은 본거지입니다. 그곳에서 만리 길을 가서 전쟁을 벌였으니, 피곤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이겼다는 소식이 없으니, 이기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상(兪相)이 연경에 사행을 갔다 와서 또한 “8만의 군대가 출동했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이겼다는 소식이 없으니, 산승(山僧)의 상소 가운데 해마다 싸워서 졌다는 말은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왕실의 여자를 바쳐서 섬기고 온갖 재물을 뇌물로 주는 것은 앞으로 있게 될 고식적인 일입니다. 사해(四海)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이미 죽은 자에게 보화를 빼앗긴 것은 형세가 곤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듣자니, 교광(交廣)의 후계(厚桂)와 사단(絲段)이 공물로 올라오지 않은 지가 여러 해이고, 촉(蜀)의 경면사(鏡面砂)도 생산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영토가 축소되고 자원이 고갈되어서 당연히 그러한 것입니다. 천하의 무력이 북쪽 변방이 막강했던 것은 간소한 정책을 쓰고 신체가 강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생장하여 사치스러운 풍속에 물들고 익숙해져 중국의 백성들과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증정(曾靜), 사사정(査嗣庭) 이후로 여덟 번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 중국의 선비로서 화이(華夷)의 분변을 언급했던 자들이 연좌되어 죽었으니, 열에 여덟아홉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시안(詩案)이 다시 발생하여 사대부의 민심을 크게 잃었다고 하니, 저들이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산해관은 오른쪽에는 대해(大海)를, 왼쪽에는 강한 오랑캐를 두고 있어 마치 호리병의 입구와 같아서 상황이 어려워지면 곤란을 당하게 됩니다. 금(金)나라 애종(哀宗)의 경우에는 산해관 밖의 수천 리나 되는 나라를 충분히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길 만하였으니, 고려 때의 동진(東眞)이 이것입니다. 동진이 우리나라를 크게 침략하지 못한 것은 원나라 세조(世祖)가 사해에 위엄을 떨쳤고, 충렬왕(忠烈王) 이후로 여섯 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를 들어 천자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의 동진에게 병탄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쫓겨서 동쪽으로 탈출하여 원나라 순제(順帝)가 북쪽으로 달아났던 것처럼 본래의 소굴로 돌아오게 되었다면, 우리나라에 끼친 피해가 더욱 심하였을 것입니다. 요동 지역은 수수〔薥黍〕만 생산되고 장령(長嶺) 동쪽으로는 수렵으로 살아가니, 참으로 제왕(帝王)이 참고 살 만한 곳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파령(巴嶺) 서쪽으로 철령(鐵嶺) 밖의 지역이 가장 먼저 저들에게 편입될 것인데, 이후의 계책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우려하는 바는, 그들이 중원(中原)의 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 가운데 필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가 함부로 허황된 주장을 제기하여 적을 도발하고 공을 세우려 할 것이니, 전쟁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시경》에 “나라 안의 여러 벗들 가운데 난리를 염려하려는 이가 없도다.〔邦人諸友 莫肯念亂〕”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일컬은 것입니다.
**[역자 주]남헌(南軒): 남헌은 남송(南宋) 때의 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의 호이다.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이고, 한주(漢州) 면죽(綿竹) 사람이다. 관직은 우문전 수찬(右文殿修撰)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선공(宣公)이다. 주희(朱熹),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불린다. 그가 주희에게 보낸 편지에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술이 흥건해지자 기(氣)가 올라 슬픈 노래를 강개(慷慨)하게 불렀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은 평상시 혈기(血氣)에서 발현된 습관을 없애지 못한 소치인 듯합니다. 사소한 문제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南軒集 卷20 答朱元晦秘書》
-이익(李瀷, 1681~1763), '안백순에게 보내는 편지 무인년(1758, 영조34)〔與安百順 戊寅〕' 부분, 성호전집(星湖全集) / 星湖先生全集卷之二十/ 書(서)-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양기정 (역) ┃ 2013
*옮긴이 주: 유학에서 경술은 성현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시서육예(詩書六禮)를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김종직(1431~1492)은 윤상의 시집서문에서 극단적으로 '경술문장일치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문장은 경술에서 나오니 경술은 바로 문장의 뿌리다. 초목에 비유하면 뿌리가 없는데 어찌 가지와 잎이 풍성하며 꽃과 열매가 아름답고 풍성하겠는가? 경학의 탁마는 문장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니 경술은 바로 시서육예(詩書六禮), 즉 시경, 서경, 禮,樂,射,御,書,數이며 시서육예의 글은 곧 문장이다....예로부터 문장으로써 그 시절을 울렸으니 그러므로 후세에 전해진 것은 이런 이치가 들어 있을 뿐이다."(김종직, 별동집서)". 참고로 조선의 유학자들은 장자나 노자의 도덕경은 불경을 포함하여 경(經)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는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일부 학문적으로 열린 선비들에만 국한하여. 불교경서를 포함해서, 참고자료 혹은 수신의 보조자료로만 참조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의 글은 대부분 우언의 형식을 빌었고, 노자는 운문형식을 갖추고 있다. 운문은 의미를 함축시켜 표현하는 시나 노래가사 등을 말한다. 시서육예의 경우, 말하는 자와 기록하는 자가 그 뜻과 의미, 서술목적을 분명하게 사실적 논리에 의거해서 밝히는 반면, 노장은 우언과 운문체를 빌어 추상적이고 함축된 것으로 양태와 양상을 표현함으로써 그 뜻과 의미가 모호하다. 이는 당연히 그 해석이 어떤 관점을 지니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구구할 수 밖에 없다. 일례로 도덕경 1장의 경우만 해도 그 해석이 100여가지에 이른다. 종교, 신념, 가치관, 이념, 학식, 식견에 따라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전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해석의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되겠다. 다만, 부분이 아닌 전체와 그 부분과 부분이 연결되는 맥락을 유추하여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따름이고 그 해석이 반증할 수 없는 추상적인 논리가 아닌 사실적인 논리에 부합되는가에 따라 말장난인지 아닌지를 추론할 따름이다. 만일 추상적인 논리로 일관하여 그 해석이 진리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신앙의 차원으로 관여할바가 아니다. 옛 글에 한 임금이 화가에게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고,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인가 물었다. 화가는 대답하기를 가장 쉬운 것은 귀신이나 도깨비며, 가장 어려운 것은 개나 닭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개와 닭은 실체가 분명한 것이고 귀신과 도깨비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실체가 불분명한 추상적인 것이기때문이라 설명한다. 공자는 글을 기록할 때 의심나는 부분은 추론적인 해석을 가하거나 끼어 맞추지 않고 사실 그대로 의문을 남긴채 기록했다. 또 공자는 주역을 항시 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주역에 대해 일절 논하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선현들이 우언을 저술할때에는 반드시 그 저술목적을 밝힌다. 출전이 분명한 고사성어의 뜻이 명확하고 그 의미가 분명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유교라는 교조적인 틀을 벗어나더라도 그 뜻과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은 실사구시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마땅치 않다는 것은 우리네 선현들의 지혜다. 참고로 율곡 이이, 퇴계 이황, 박세당, 홍석주 같은 이들의 경우를 보자면, 노장의 책이 식견과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보조적인 참고공부 그 이상을 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여튼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 동양적인 이단학설과 현학사설이 대부분 여기에서 나온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작 문제는 외부로 인해서 한번 고착된 인식의 틀, 맥락적 사고를 주도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의 틀이다. 이를 깨는 것은 정말 어렵고 고통스런 일임을 실감한다... "성인(聖人)이 미워하는 부류는 무엇보다도 향원(鄕愿)입니다. 옳은 것 같지만 실제는 그르고 행동이 모호한 자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심술(心術)의 적(賊)은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기 십상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품은 바가 무엇인지를 관찰해 보면 모두가 실제에서 우러나온 학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이익, 위의 글에서)" .
[출처] [고전산문] 진짜와 가짜는 뒤섞여있기 십상이다 / 이익|작성자 파르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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