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그리고 큰집과 작은집의 제사(글/이해영) |
조선조 양반가의 가장 큰 일은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들고 손님을 잘 접대하는 이른바 봉제사 접빈객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제사 중에 특히 고조 이하 4대 조상에게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와 기제를 받지 못하는 5대 이상의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묘제가 중요시되었다. 불천위(不遷位)란 5대조 이상의 조상이면서 기제의 대상이 되는 특별한 신위(神位)이다. 그러므로 불천위는 종가에 봉안되기 마련이다.
고조의 소종을 계승하는 사람은 자신이 현손이 되니 고조, 증조, 조부, 부친을 제사지낸다. 증조의 소종을 계승하는 사람은 자신이 증손이 되니 증조, 조, 부를 제사지낸다. 조부의 소종을 계승하는 자는 자신이 손자가 되니 조부, 부를 제사 지낸다. 부의 소종을 계승하는 자는 자신이 아들이 되니 부만을 제사지낸다. 이를 소4종(小四宗)이라 하고 대종과 합하여 5종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조까지의 관계를 4친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조의 소종을 계승한 경우 사당에는 4대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게 마련이다. 고조가 같은 항렬 자손들은 8촌 사이이다. 그러므로 고조의 자손들은 모두 8촌 이내의 집안간, 즉 당내친이 된다. 우리나라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忌日)에 지내는 기제(忌祭)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당내친은 기제를 함께 받드는 제사집단이므로 예전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로 인정되었다. 유교 이념을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정한 조선조에서 고조, 증조, 조, 부까지 4대를 제사 모시는 이른바 4대봉사가 일반적인 경향으로 정착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이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른바 주자가례가 아주 폭넓게 시행되고 나서부터인 것이다. 그런데 주자가례에는 고조까지의 4대 봉사를 하는 이유는 예(禮)에 고조부모까지 상복을 입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고조부모의 복을 입는 것이 예이므로 4대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에 맞는다는 것이다. |
신문에 따른 봉제사의 차등 원래 조선 초기에는 4대 봉사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성종 16년 (1485년)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봉사(奉祀)조에 보면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를 제사 지내고 칠품이하는 2대를 제사지낸다. 서인(庶人)은 다만 부모 제사만 지낸다고 되어 있다. 즉 6품 이상의 관직자는 증조부까지, 7품 이하의 경우에는 조부의 제사까지 허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제한은 예기(禮記) 주례(周禮)등의 고례(古禮)에 기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자는 7대, 제후는 5대 대부는 3대 사는 2대만을 제사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봉사의 신분적 차등적 제한은 조선 중기까지 지속된다. 원래 봉사의 차등적 제한은 이미 태조 때 정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차등 봉사에 관하여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이전에도 여러 번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10년에서 11년 (1428-9년)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의 제도와 정자와 주자의 예설에 따라 차등봉사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차등봉사를 유지하자는 주장으로 나뉘어 논의가 진행되었다. 차등봉사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오복이 다름이 없고 모두 고조의 복까지 입으니 제사도 고조까지 지내야 한다는 정자의 주장과 주자가례를 근거로 제시하고 나아가 명나라의 품관도 4대봉사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어 그들은 아비가 6품 이상이라면 3대를 제사지내게 되는데, 자신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 무직이면 다만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증조와 조의 신주를 철거해야 하며, 뒤에 만일 그 아들이 6품에 제수되면 철거한 신주를 다시 세워야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니, 이처럼 차등봉사를 하게되면 아버지가 돌아가서 그 아들이 대를 이을 때, 자칫 아들의 관직이 등급에 미치지 못하면 신주의 처리가 매우 곤란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철폐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차등 봉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는 차등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차등봉사 제도의 유지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관직에 따른 차등 봉사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후자의 입장이 다수를 차지하여 경국대전에 차등 봉사가 규정된 것이다. 그 후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한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4대 봉사가 다시 거론되었다. 그들은 주자가례의 시행 폭을 확대하고자 하였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승인 받지는 못하였다. 주자학을 존숭한 퇴계도 이처럼 제사의 대상을 지위에 따라서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주자가례에는 누구나 4대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음에도 이처럼 제한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라 제도에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지낸다는 말은 더욱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7품 이하에 있을 때는 비록 2대까지만 제사지낸다고 하더라도 만일 6품으로 오르면 마땅히 3대까지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인데 이때는 신주를 더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6품 이상은 3대까지 제사지낼 수 있다 하더라도 혹은 죄로 인하여 벼슬이 깎이면 증조의 신주는 헐어야 할 것인가. 한번 만들고 한 번 헐어버리는 것은 자손들의 벼슬 높고 낮은 데 달렸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 이점이 특히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 후 4대 봉사는 국가 제도와는 달리 주자학적 이념의 차원에서 널리 시행되었다. 즉 주자가례의 보급과 확산에 따라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4대까지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 이에 따라 경국대전 봉사 조항에 실린 차등봉사는 실제 관행과는 다른 형식적 제도가 되고 말았다. 4대 봉사의 경우 4대까지 제사를 받들던 사람이 돌아간 후 대상이 끝나면 그 사람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게 되는데 사당에 원래 있던 4대조의 신위는 자연히 새로이 제사를 받들게 되는 사람으로부터 5대가 된다. 이를 친진(親盡)이라 하였다. 즉 4친의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이다. 그 경우 그 신주는 복이 끝나지 않은 즉 그 신위로부터 4친에 해당되는 다른 집으로 옮기거나(遞遷) 묘소 앞에 묻게 된다.
신주를 묻는 것을 조매( 埋)라고 한다. 신주를 조매한 조상은 기제의 대상에서 벗어나 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묘제의 대상이 된다. 4친의 대상이 되는 다른 집으로 일단 옮겼다가 4친의 관계가 마무리 되면 다시 신주를 조매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런데 조매의 대상에서 벗어나 영원히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대상이 있다. 이를 불천위, 또는 부조위(不 位)라고 한다. |
역사속의 불천위 조선시대에 정해진 불천위에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 유림의 공론으로 천거한 유림불천위, 문중의 뜻을 모아 정한 문중불천위 등이 있다. 국불천위는 국가에서 죽은 이의 탁월한 공적을 인정하여 불천위를 명하는 것으로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공신, 문묘에 배향된 유현, 절의의 충신, 큰 공적을 남긴 신하가 대상이 된다. 이에 비해서 유림불천위는 그 지역의 유림들의 공론으로 그의 학문과 인격과 행실이 뛰어나다고 인정되어 불천위로 모시는 것이다. 한편 문중불천위는 그 문중에서 불천위로 모셔야한다고 뜻이 모아진 그 문중의 훌륭한 조상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3년(1457)의 기록을 보면 예조에서 "천자 7묘, 제후 5묘, 대부 3묘이지만 천자와 제후 모두 백세불천위가 있고 대를 이어온 대부의 경우에는 처음 봉해진 사람을 불천위로 제사지냈으니 개국공신(開國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정난공신(靖難功臣)·좌익공신(左翼功臣) 이 다섯 공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삼묘(三廟) 이외에 별도로 일실(一室)을 만들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건의하자, 세조가 허락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이 경국대전에 반영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해 공신에게만 주어지던 불천위는 후대에 들어와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영조, 정조에서 조선조 말에까지 두드러지는데 영조 30년(1754년)에는 공주·옹주·대군·왕자는 비록 4친의 관계가 끝나더라도(親盡) 부조(不 )의 신위(神位), 즉 불천위로 정하도록 규정되었다.
영조 33년(1757년)에는 문묘 배향된 유현들은 모두가 불천위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국불천위의 확대는 자손이나 유생들의 소청에 의하여 가속되는데 1754년 이후에는 공신 이외에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에게도 부조위를 허락하는 전례가 시작되었고 나아가 공적을 추후 기념하여 부조위를 허락한 예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1754년부터 정조 14년(1790년) 사이에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척화(斥和)를 주장한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 등과 강도(江都)에서 순忠公) 김상용(金尙容) 등과 임진왜란 당시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등과 단종 때의 상신(相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모두 절의(節義)로써 부조위가 되고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 충숙공(忠肅公) 이덕형(李德泂),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 등은 모두 공렬(功烈)로써 부조위가 되었다. 문충공(文忠公) 이시직(李時稷), 충현공(忠顯公) 송시영(宋時榮) 등도 절의로써 부조위가 되었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도 그의 신주(神主)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특별히 부조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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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의 불천위 알려진 바로는 안동 지역에는 몇 분의 국불천위를 포함하여 47분의 불천위가 있다. 불천위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동은 퇴계 이래 그 영향의 학맥 속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그에 따라 불천위 가운데에서도 유림불천위의 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유림불천위는 지역유림의 공론을 바탕으로 모셔진 불천위이다. 유림에 의하여 불천위가 되는 과정은 각 지역의 향교나 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각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각 인물의 공적을 살피고 자격조건을 공정하게 검토한 후 합의하여 유림의 결의를 거치게 된다. 1779년 변중일(1573-1660)의 부조(不 )를 정할 때에 원근의 사림들 280여명이 모여 결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불천위로 모시고자 하면 문중에서 통문을 유림에 보내고 유림들은 서원이나 향교 등을 중심으로 불천위의 대상이 될만하다는 의견을 모아 의견이 모아지면 결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나 싶다. 안동의 불천위 대부분이 아마도 이러한 경로를 거쳤을 것이다.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뛰어나게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는 의미이므로 문중 전체의 영광이었다. 안동에서는 불천위 제사를 대묘제사, 또는 큰제사라고 하는데 불천위는 대개 한 파의 파조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불천위제사에는 종가가 자리잡고 있는 마을은 물론이고 불천위의 자손이 되는 원근의 일가까지도 참여한다. 또한 학맥이나 혼맥 등으로 얽힌 타 문중에서도 참여한다.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많은 경우 서원에도 배향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단순히 한 문중의 제사가 아니라 지역 내지 학문적 연관을 지닌 모든 이들의 제사도 되는 것이다.
불천위 제사는 훌륭한 조상의 덕을 기리고 혈족의 정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문중의 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문중의 자손으로서 5대가 지나면 벗어나는 일반 친족의 범위를, 영원히 옮기지 않는 불천위의 같은 자손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확대하여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불천위 제사인 것이다.
이름난 불천위 제사에는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지역 유림의 현안들이 논의되기도 하고, 또한 불천위의 후손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문중의 여러 문제들이 논의되는 임시 문회가 열리기도 한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해 학봉 종가의 불천위제사를 참관한 일이 있다. 수십여명이 넘는 제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경건하면서도 축제와 같은 느낌을 주는 제사 과정에서 자랑스러운 조상을 둔 자손들의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필자는 이들이 불천위제사에서 단순히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긍지를 갖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훌륭한 조상을 모신 내가 조상의 행적을 이어 보다 훌륭한 인격과 행실을 갖추어 살아가야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계기를 얻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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