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를 불태우고 빼앗은 2代 天子之地, 남연군 묘소 - 흥선대원군의 염원

가야산 석문봉 아래 2대 천자지지(2代 天子之地)라 일컬어지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
풍수학인들이 자주 찾는 답사지 가운데 한곳이, 원효대사께서 산 모습과 물 기운이 뛰어나 나라 땅의 내장과 같은지라 ‘내포’라 했다는 충남 내포지역의 예산 땅이다. 옛날부터 그곳엔 천하제일의 명당 자미원(紫微垣)이 있다고도 했으며, 그래서인지 명당을 찾는 사람들도 유독 예산 땅으로 많이 몰린다.
20여 년 전에만 해도 친숙한 정치인 중 이회창 전 총재는 선영이 예산에 있는데, 선친이 돌아가시자 선영 아래에 모셨다. 16대 대선을 앞두고는 예산 신양면으로 옮겼고 17대 대선을 앞두고 다시 예산 땅 선산으로 이장을 한다.
김종필 전 총재도 선친의 묘소를 예산군 신양면으로 이장했으며, 한화갑 전 총재도 고향에 있던 선친의 묘소를 예산에서 가까운 유구로 이장한다.
또 한때 자칭 풍수도사로 행세했던 육관 손석우도 죽은 뒤 예산 땅에 묻히는데, 생전에 본인이 잡아놓은 자리라고 한다.
이렇듯 예산은 풍수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볼거리와 공부거리가 많은 땅이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조선조 말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실종되어버린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그의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고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는 남연군 묘소이다. 금년 추석영화 <명당>의 소재가 된 곳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풍수지리를 철저히 신봉했던 사람으로 묘지풍수의 위력으로 허울뿐이었던 전주 이씨 왕족의 권위를 회복한 야심가였다.
남연군 묘소와 대원군에 관한 숱한 얘기들은 황현의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강의 내용은 일치한다.
흥선대원군의 자는 시백(時伯)이요 호는 석파(石坡)로 영조의 현손(玄孫)이다.
나이 20에 흥선군에 봉해졌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 제대로 힘을 펴지 못하는 허울뿐인 왕족이었다. 임금까지도 세도가에게 휘둘리고 무시당하는 조정의 현실을 보면서, 힘없는 왕족으로서의 설움을 가슴깊이 새기며 언젠가는 안동 김씨 세도를 타도하리라 굳게 결심한다.
그는 야심을 숨기고 세도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날마다 술에 취해 파락호(破落戶)처럼 행세한다. 일부러 술에 취해 시궁창에 엎어지기도 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옷에다 흐트러진 의관을 하고 대감댁 잔치상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대는가 하면, 기생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 나오기도 한다.
세도가들의 눈에 똑똑한 왕족으로 비치거나 총명하다는 인상을 주는 날에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 회복에 대한 염원(念願)을 가슴속에 숨긴 채 절치부심 안동 김씨의 세도를 물리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뾰쪽한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고심하던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신의 공력을 빼앗아 하늘이 정해놓은 인간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奪神功 改天命)는 풍수지리에 의존하기로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조상을 명당에 모셔 간절한 소원을 이룩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정만인이라는 명사를 만나 소위 ‘2대 천자지지(二代 天子之地)’라고 하는 대 명당을 얻었다는 것이다.
가야산 석문봉(石門峰)아래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춘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소를 이장해 온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7년 만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을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이 아이가 고종이 되었으며, 그 아들이 순종이니 틀림없이 2대 천자를 얻은 것이다.
아들 명복이 12살 되던 해에 철종이 후사(後嗣) 없이 돌아가자, 흥선군은 왕실의 어른인 조대비와 손잡고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리며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에 봉해지고 섭정을 시작한다. 이로써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남연군 묘소에는 흥선대원군의 야망과 염원이 함께 묻혀있다. 대원군은 정만인에게서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가 있고, 오서산에 만대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는데, 만대영화지지가 낫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야산의 2대 천자지지를 택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리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고 매수한 후, 중들이 절을 비우게 한 다음 그 틈을 타 절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기 아버지의 묘를 쓴다.
실로 사무치는 염원과 야망이 없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연군 묘소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풀어보려던 독일 상인 오베르트에 의해 파헤쳐지기도 하고, 두 임금을 끝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맥이 끊기는 결과를 낳았으니 과연 천하 대명당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남연군 묘비. 묘비의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다
훗날 안동 김씨는 대원군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는데, 대원군과 안동 김씨 사이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안동 김씨는 문중회의를 열고 종가댁으로 대원군을 초청한다. 면을 좋아하는 대원군을 위해 큰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대원군은 일부러 세 시간씩이나 늦게 간다.
김씨 일가에서는 조심스럽고 어려운 자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도착하자 곧 바로 면이 나왔고 한입 가득 면을 넣고 씹던 대원군이 갑자기 면을 뱉으며 소리쳤다.
“독이다, 독약이다!”
주위는 온통 사색으로 변했고 대원군은 김씨 문중을 노려보았다.
'이들을 모두 끌어내라!' 한마디면 안동 김씨는 풍비박산 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안동 김씨 종손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대원군이 뱉어놓은 면을 두 손으로 쓸어 담아 자기 입에 넣고 먹는 것이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변명이 필요 없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종손의 재치와 기지가 빛났지만 대원군도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농담으로 한번 해 본 소리인데, 자실 것까지야 뭐 있소? 허허 내가졌소.”
안동 김씨에게 당한 숱한 수모를 참고 버티어 온 대원군의 농담 한마디에 안동 김씨는 멸문의 사선을 넘나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저승체험을 한 것이다.
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절을 없애고 그 자리에 아버지 이구의 무덤을 쓴 대원군은 아들이 임금이 된 뒤 남연군 묘 맞은편 서원산(書院山) 기슭에 절을 짓는다.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보덕사(報德寺)란 이름을 내렸는데, 절의 시주자(施主者)가 큰 아들 이재면(李載冕)으로 되어 있으니,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실원찰(王室願刹)인 셈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덕사는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많은 전토(田土)와 보화가 내려졌다’고 전한다. 애석하게도 한국전쟁 중 불타 없어져 웅장하고 화려했던 절의 모습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지금은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담한 비구니 사찰로 남아있다.
남연군 묘소에서 150m쯤 떨어진 왼쪽 산기슭에는 거칠고 투박하게 조각된 돌부처가 계곡을 향해 서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청룡 계곡의 허결함을 비보하기 위한 석상이다.
이 돌부처는 원래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버렸다는 설화가 있다.
코는 보수한 흔적이 있는데, 돌부처의 코를 떼어 가면 아기를 못 갖는 아낙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코를 떼어갔기 때문이라 한다.

남연군 묘소를 등지고 서있는 상가리 석불. 멀리 남연군 묘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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