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포은선생 학통(2018 .8 .18)

장수골 2018. 8. 11. 00:12

영남의 광주안씨 관련 학통 정리

http://botw.egloos.com/10019499

 

고려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후 근대까지 학통이 전수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겠다. 우선 안향 (安珦, 1243 ~ 1306)부터 고려말까지의 과정은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 안향 백이정 권부 이제현 주도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면 된다. 포은과 목은 이후의 전수 과정을 주로 정리해 보겠다.

흔히들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金宏弼, 1454-1504)  

과 같이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말은 아니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의 문인으로 보기는 어렵고, 양촌 권근의 문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와 같은 학통에 속한다. 다만 정몽주의 학통은 위와는 달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조용(趙庸, ?∼1424) -->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 -->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와 같은 계통으로 김숙자에게 전해지는 것은 맞다. 김숙자는 또한 야은 길재의 문인이기도 하므로, 목은과 포은의 학통을 모두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만 목은은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 많은 불교 관련 글들을 남기기도 한 반면에, 포은은 배불적 면모가 상당히 강했으므로 조선조 사림들은 목은보다 포은을 훨씬 더 유학의 이상에 맞는 인물로 여긴 탓에 위와 같은 부정확한 계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중기 이후의 선비들은 고려조에 충절을 지킨 사람들을 유학의 충을 실현한 것으로 본 탓인지 조선 개국 공신들보다 더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포은이 고려조에 대한 지조를 지켜 순절한 것도 더 추앙받게 된 이유인 듯하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도 조선 개국공신보다 고려 충신들을 더 높이 평가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많은 문인들을 두었는데, 대다수가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에 희생된다.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김굉필도 다수의 문인을 두었는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에 희생되고, 다른 제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문하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같은 인물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일정한 스승은 없이 당대의 여러 인물들과 종유하며 영향을 받았는데, 정암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비문을 짓기도 하고, 김안국을 만나 감화를 받기도 했으며, 그 문인 김인후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영향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퇴계와 같은 시대의 거유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도 일정한 스승은 없고, 당대 여러 사람과 종유하며 영향을 받았다. 퇴계와 남명 학통의 사람들은 대개 영남 지역에 거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벌어지면서 남인 계열에 속하게 된다. 한편 서인 학통의 태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등은 퇴계와 학설을 달리 하지만 퇴계를 방문하기도 하고, 영향도 받았다. 우계 성혼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인 백인걸(白仁傑,1497∼1579)의 제자이다.

광주안씨 문중으로는 주부공파나 서령공파의 다수는 율곡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