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토끼비리

장수골 2014. 7. 28. 20:48

새재 29 - 토끼비리 대구일보

2013/07/2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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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는 영남과 한양을 잇던 영남대로였다.

부산 동래에서 낙동강을 따라 대구와 구미를 거쳐 문경에 이르는 영남대로 구간에는 문경 남쪽의 관갑천, 밀양의 작천, 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 용추 부근,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左岸), 양산의 황산천 등 모두 5곳의 천도(遷道ㆍ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가 있었다.

이 가운데 토끼비리라고 불리는 관갑천은 오정산 자락을 돌아 문경새재로 이르는 길로 ‘토끼가 다닐 만큼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른 명칭으로 곶갑천, 토천, 토잔 등으로 불린다. 2007년 길 문화재 최초로 명승으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문경새재에서 남쪽으로 15km 거리에 있는 토끼비리는 이름도 사연만큼 많은 곳이다. ‘비리’라는 말은 ‘벼루’라는 문경지역 사투리로 벼랑과는 구별된다.

토끼비리는 벼랑에 만들어진 길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길이다.

◆꼬불꼬불 양 창자 닮은 토끼비리

조선시대 묵객들은 ‘관갑잔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잔도(棧道)란 강가의 험한 벼랑부분의 선반처럼 달아서 만든 길을 말한다.

조선초기 문장가 별동(別洞) 윤상(尹祥ㆍ1373~1455)은 “험한 산길은 양 창자와도 같고 위태로운 봉우리 말귀처럼 기이해 한 뼘 나갔다가 다시 돌아서야 하니 조심해서 더딘 것을 탓하지 마소서”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ㆍ1420~1488)은 “꼬불꼬불 양 창자 같은 길이며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키도 하여라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라고 토끼비리의 험한 길을 표현했다.

이렇게 묵객들은 한결같이 위험하고 구불구불하고 지나다니기 어려운 구절양장을 생각나게 하는 길의 험준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힘이 든대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나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토끼비리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관갑천(串岬遷)이라고 불리는 토끼비리에 대해 “관갑천은 용연 동쪽에 있고 토천(兎遷)이라고도 부른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시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그 북쪽에 고모산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여러 계곡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라서 벼랑을 따라 잔도를 열어 인마가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로는 깊은 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길손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견탄이다. 견탄은 호계현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며,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곶감원터 아래에 있는 약 2km되는 토끼만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벼랑에 난 좁은 길이다. 태조가 신라를 치러 가는데 이곳에 길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 토끼를 따라 길을 찾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새재와 함께 국방의 요충지

천년산성인 고모산성과 연결된 토끼비리는 문경 오정산의 층암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 1km, 폭 1m의 벼랑길이다. 그 옛날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기 전 영남대로 가운데 최고의 험로로 꼽히는 이 벼랑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듯 넘어야 했다.

임진왜란 때에도 신립 장군이 토끼비리와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에 대해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문경 남쪽 십여 리 밖에는 옛 성인 고모산성이 있다. 이 성은 좌도 우도 경계에 있고, 양쪽의 산 벼랑은 묶어 세운 듯하며, 큰 내가 그 가운데로 흐르고 그 아래에 길이 있어 몹시 험준한 곳이었다. 원래 적들은 여기서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해서 사람을 놓아 재삼 와서 탐지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음을 알자 좋아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새재와 함께 국방상의 요충지였던 토끼비리의 험한 요새를 이용하지 않은 점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질책이 끊이지 않고 있다.

토끼비리는 지금은 허물어지고 토사가 쌓여 비좁은 오솔길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가마꾼, 마차도 이 길을 오갔다. 특히 이 길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 아니라 바위를 깎거나 파내 일부러 만든 길이어서 그 가치를 더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일부 구간에 대해 문경시가 복원했다.

토끼비리 잔도는 복원된 석현성(石峴城)이 시작되는 지점과 연결돼 있다.

석현성은 신라가 쌓은 고모산성의 익성(翼城ㆍ성의 부족한 기능을 돕는 성)으로, 고모산성 남문과 연결돼 있다. 1596년(선조 29)에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는 401m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새재 3개의 성이 뚫리는 비극을 교훈 삼아 외적을 사전에 막기 위해 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벼랑길을 깎아 축성한 토끼비리

토끼비리는 바위를 파서 만든 길이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다니다 보니 바위가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벼랑길을 깎아서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의 공법을 이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경시가 2002년 발간한 조사연구총서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에 의하면 토끼비리 잔도를 세 구간으로 나뉘어 볼 때 제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노면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토석 유실방지를 위해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다. 제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 석회암과 역암(礫岩)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 구간은 잔도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지점에 축대를 쌓아 길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길을 넓혔음을 입증하는 흔적들이 발견됐다. 제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2구간과 3구간 사이에는 석회암맥이 돌출한 부분이 나타난다. 고대 토목 기술자들은 이 암맥의 가운데를 높이 4m, 밑부분 폭 4m 정도를 절단해 인공으로 암석안부(岩石鞍部)를 만들었다. 이 안부는 영남대로 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안부로부터 약 300m는 영강의 공격사면에 해당하는 절벽을 ‘ㄴ’자로 절단해 도로를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토석으로 덮여 있다.

토끼비리 주변 지형은 마주 보이는 어룡산 정상이나 뒤편의 오정산 중턱에서 바라보면 이곳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게 된다. 특히 강을 끼고 있어 토끼비리를 통과하지 않으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간에 어디든지 오고 갈 수 없는 사면초가에 갇히게 되는 형상이다.

그러니 고려 태조 왕건도 지형적 조건을 모른 채 이곳을 지나다가 길이 끊어져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을까? 신라 때 생명을 얻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되던 토끼비리는 일제시대 건설된 국 국도 3호선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지금도 벼랑에 만들어진 길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길이다.

◆고모산성과 진남교반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姑母山)에 있는 산성으로, 토끼비리의 출발점인 석현성의 오른쪽 날개와 이어져 있다.

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지난 2005년 문경시가 유적정비를 위해 의뢰한 중원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견된 대규모 지하목조건축물 등 출토 유물과 그 중 유기물질 일부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결과 등을 토대로 할 때 5세기 중ㆍ후반 무렵에 신라가 쌓아 활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모산성은 서북쪽으로 험준한 소맥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영남지방과 한강 이남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자리 잡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볼 때, 대(對) 고구려용 군사시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모산성은 고모할미와 고부할미가 경쟁하며 하룻밤 새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고모성이 동쪽에 있는 주성(主城)이고, 고부성이 서쪽에 있는 부성(副城)이다.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산성 전체의 평면형태는 마름모꼴이다.

산성 규모는 둘레 1천256m, 익성인 석현성의 길이는 390m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1천646m에 이르는 큰 산성이다.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片築式)으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다.

현재 성안으로 통하는 길은 5개소가 있다. 옛 성벽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문지와 북문지, 동쪽 성벽의 일부분만 남아 있다.

고모산성에 올라서면 오정산과 영강, 구 3번 국도가 나란히 태극모양처럼 굽이돌아 산태극, 물태극, 길태극 등 삼태극으로 유명한 진남교반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숲이 울창하고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절경을 이뤄 문경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문경시 엄원식 문화재담당은 “옛길의 고장 문경에서도 진남교반은 빼어난 봄 풍광과 더불어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근대, 현대 등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글ㆍ사진 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