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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 - 조선 초기 학자들(2010 .10 .26)

장수골 2010. 10. 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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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유학

 

  초기의 유학

 

 * 윤상(尹祥; 1373~1455, 공민왕22~단종3, 세종대의 학자. 호 別洞)

 '윤상'은 태종 때 등과하여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전후 16년 간 근속하여 일대 명현 중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화려하지 않은 교육계에서 청념결백하게 인재 교육에 힘쓴 매우 지조가 고상한 선비였다.  당시 그는 매우 이례적인 학자로서 혁혁한 저술을 남긴 것도 없으나 조선의 문운을 일으키고 유학을 발전시키는데 간접적인 공로가 지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대사성직에 있을 때인 1421년(세종3) 왕자 향(珦; 세종의 장남으로 5대 문종이 된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의식에서, 유교식 복장을 하고 '태학'에 들어가 알성(謁聖)토록 하였는데, 그 뒤에 이러한 의식이 태자를 책봉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정착된다.  이는 왕세자가 공자의 제자임을 전국에 공표하고 후일 왕이 되어서도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맹세의 의미가 있으며, 유교를 국교로 수립하였다는 가장 명백한 선언인 것이다.

 

 

 * 유숭조(柳崇祖; 1452~1512, 문종2~중종7, 성종대의 성리학자. 호는 眞一齋)

 세종과 세조 등의 왕들이 불교를 숭봉하여 다시 고려로 돌아간 듯한 경향을 보였으나 성종대에 이르러 완전한 '숭문존유(崇文尊儒)'를 행하며 다양한 억불책과 문교 발전을 위한 정치를 시행함으로써 문운이 융성한시기에 '유숭조'는 많은 경서를 언해(彦解)하고 한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1511년(중종6)에는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라는 송(宋)학자들의 성리에 관한 저술들 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정리한 책을 편찬하였다.  현재 성리에 관한 부분은 많이 망실되었으나 '정복심(程復心; 호는 林隱, '주희'의 <四書集註>에 '황간'과 '보강'의 학설을 절충하여 章을 나누고 圖를 만들었다)'의 '이기론(理氣論)'을 채록하여 훗날 '이황'의 <사단칠정(四端七情)>론의 선창자 역할을 한다.

 유숭조 역시 '윤상'과 마찬가지로 교육가로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드러냈다.

 

 

 * 조광조(1482~1519, 성종13~중종14, 중종대의 학자. 호는 靜庵)

 연산군에 의해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데 급급하였던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과거(科擧)에 구애되지않고 널리 인재를 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종은 1514년(중종9)에서 1519년(중종14) 12월까지 약 5년간 '조광조'로 하여금 대담한 유교정치를 실행하도록 한다.  그러나 학자와 정치가는 그 소질이 다르고 경학(經學)과 경륜(經綸)에는 차이가 있었다.  조야(朝野)의 모든 유자(儒者)들은 '조광조'의 원칙론과 집요한 도덕설에 직면하게 되었고, 급기야 1519년 12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그의 이상 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38세에 사망한 '조광조'는 학자로서의 수업도 충분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한 때 선비들을 대표하여 대담하게 학자정치를 실행한 일을 제외하면 그가 조선의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다.  그러나 '조광조' 이후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학문이 '진검(眞劍)'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이이'는 <율곡언행록(栗谷言行錄)>에서 "도학은 조광조에서 비로소 일어나 이황에 이르러서야 유자의 모습이 이루어졌다"라고 하여 '조광조'가 후학의 존경을 많이 받았으며 조선 제일의 대유(大儒)로 여겨 문묘와 서원에 배향한 이유의 일단을 보여 준다.

 

 

 *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성종22~명종8, 중종대의 성리학자. 호는 晦齋)

 일찌기 관료로서 정치에 참여한 탓에 유학자로서 그의 위대한 점은 많은 부분 감춰져 있었다.  제자를 가르칠 기회가 적은 탓이었다.

 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명종 � '을사사화'로 살해) 서자인 '이전인(李全仁)'이 부친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궁금한 부분을 부친의 친구인 '이황'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이황'이 '이언적'을 한번 추존하자 여타의 학자들이 모두 그를 대유로 여겨 문묘에 종사하기에 이른다.

 '이황'이 '이언적'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조한보(曺漢輔; ?~?, 중종대의 성리학자. 호는 忘機堂)'와 '이언적'이 주고 받은 서찰에서 '무극'과 '태극'을 논하며 주희의 이론을 반박한 '이언적'의 논리정연한 반론에 감탄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는데 '조한보'와 '이언적'의 서한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성종20~명종1, 호는 花潭, 復齋)

 '이이'의 평가대로 '서경덕'은 조선조의 매우 독특한 사색가였다.  그런 점에서는 '이황'을 능가하나 그는 사색가였지 저술가나 강연자는 아니었다.  오직 <화담집>, 한 권만을 저술하였으나 양에 비해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조선의 학술 문헌 중 그 예가 드물다.

 '이황'은 '서경덕'을 주희의 학문에 '순수하지 못하다'라며 비난하였으나 '이이'는 그를 대단히 추존하였다.  '서경덕'의 학설이 무작정 주희를 따르는 것이 아니었으니 조선의 유학이 주자학으로 귀일하는 경향이 성하여짐에 그의 학설은 더욱 쇠약해진다.

 

 

 *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중종10~선조23, 호는 蘇齋, 伊齋)

 '노수신'은 중종, 명종, 선조의 3대에 걸쳐 활동하였고 '이연경(李延慶;1484~1548,호는 灘叟)'을 종유하였다.  그는 당시의 다른 유자들과는 달리 '나흠순(羅欽順;1465

~1547, 명대 기철학자. 자는 允升, 호는 整庵)'의 학설에 찬동, 자못 선학(禪學)적 요소를 가진다.

 그는 중종 때에 등과하였다가 1545년(명종 원년)에 '윤원형(尹元衡)'이 꾸민 옥사로 정언(正言)직을 삭탈 당하고 진도에 유배되어 19년을 보낸다.  그 간에 송의 유가서 이외에 불가서를 탐독하여 불교의 교리를 자득한다.

 귀양살이 중에 '노수신'은 자신이 주석을 단 '진백(陳栢)'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이황'과 '김인후'에게 보내는데, 주석 문구의 견해 차이로 세 사람 사이에 왕복논변이 시작 된다.  주로 '노수신'이 주자학에서 일보 나아간 '유심론적 경향'을 논박하는 내용이었는데 '노수신'은 '나흠순'의 영향과 자신이 처한 유배라는 상황에서 자연히 '선학'으로 흘렀던 것이다.  때문에 '이황'은 그의 학문, 또한 순수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노수신'은 조선의 유학자 중에서 불교 사상을 이해하고 애호하여 유가서에 대한 해석까지도 선학적 의미를 가미한 최후의 인물이 된다.   

 

 

대성전 전경(1601 중건), 보물 제141호, 서울 종로구 명륜동

 

 

출처 : 禪偈非佛
글쓴이 : 선게비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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