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 18현과 동방 5현(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대가들)(201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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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18賢과 동방 5賢
동방 18현(東方十八賢)또는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은 문묘에서 배향하는 한국의 유학자들을 말한다. 동방 18현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홍유후 (弘儒侯) 설총
문성공 (文成公) 안유(안향)
문충공 (文忠公) 정몽주
문헌공 (文憲公) 정여창
문경공 (文敬公) 김굉필
문원공 (文元公) 이언적
문정공 (文正公) 조광조
문정공 (文正公) 김인후
문순공 (文純公) 이황
문간공 (文簡公) 성혼
문성공 (文成公) 이이
문열공 (文烈公) 조헌
문원공 (文元公) 김장생
문정공 (文正公) 송시열
문경공 (文敬公) 김집(김장생의 둘째 아들)
문순공 (文純公) 박세채
문정공 (文正公) 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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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5현(五賢) -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대가들
우리나라 유학의 명현(名賢) 18인 중에서도 조선 시대 성리학을 이끈 대 유학자들을 일컬어 '동방5현(東方五賢)'이라고 합니다.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이 동방5현입니다.
그럼 동방5현이란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이 말의 등장 배경은 재야(在野)의 사림(士林)세력이 훈구파(勳舊派)와의 대립을 거쳐, 조선의 정치 무대를 장악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잇는 사림세력은 성종(成宗) 시대에, 중앙의 정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사림 세력은 정치 무대에 등장함과 동시에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 격렬한 갈등과 대립을 겪습니다. 이 갈등과 대립은 결국 연산군 시대에 들어와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훈구파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가 끝나고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자, 당시 두 차례의 사화에서 살아남은 사림 세력은 다시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합니다. 그러나 초기 중종의 후원 아래 추진한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훈구파의 거센 반격에 꺾이면서, 사림세력은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기묘사화로 큰 타격을 입은 사림세력은 향리(鄕里)에 몸을 숨긴 채 후진 양성에 애쓰는 한편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에도 힘을 쏟습니다. 중종 말년에 들어 사림세력은 중앙의 정치 무대에 재등장하게 되지만, 다시 명종(明宗) 때 치른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정미사화(丁未士禍)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명종 20년에 외척 정치(外戚政治)를 이끈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쫓겨나자, 사림세력은 중앙 정치 무대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들은 이후 선조(宣祖) 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명실상부한 권력 집단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중앙의 정치 무대를 장악한 사림세력은 성리학(性理學)을 국가 통치의 이념과 원리로 삼았습니다. 또한 사림 권력의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전통과 계보를 세우는 일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사업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성리학의 전통과 계보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곧 성리학의 통치 이념과 원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선조(宣祖) 즉위와 동시에, 기대승(奇大升)과 이황(李滉) 등은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등 선대(先代)의 사림들을 높이는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결국 선조3년에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등 4현(四賢)을 성균관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이 상소문을 통해, 이황(李滉)이 선대(先代)의 사림을 칭송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4현(四賢 :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라는 말이 공식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후 사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이황이 사망하자, 사림세력은 기존의 4현(四賢)에 이황을 포함하여 5현(五賢)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림세력은 5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운동을 끈질기게 폈습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사림의 분열과 임진왜란 등의 혼란을 겪으면서 큰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의 상흔(傷痕)이 조금씩 가라앉고 나라가 안정되자, 다시금 5현의 문묘 종사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결국 선조가 죽고 광해군(光海君 : 제15대)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1610년, 이들 5현은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配享)됩니다. 1570년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시작된 동방5현의 문묘종사(文廟從祀)는 4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번 일흔한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들 동방5현 중 가장 혹독한 시련과 고초를 겪은 김굉필과 조광조의 삶을 살펴보면서, 초기 사림세력이 조선의 역사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옹 김굉필과 무오사화
사옹(蓑翁)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입니다. 김종직은 비록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從祀)되지는 못했지만, 정여창과 김굉필 등에게 학문을 가르친 사림파의 큰 스승입니다. 또한 사림파의 중앙 정계로의 진출에 물꼬를 튼 사람 역시 김종직이었습니다. 김종직을 비롯한 초기 사림파들은 유학의 여러 경서(經書)들 중에서도 특히 『소학(小學)』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소학』을 유학자로서의 올바른 삶과 생활을 결정짓는 도덕적·실천적 기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김종직은 김굉필 등 제자들에게 항상 '모든 학문의 시작'을 『소학』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때문인지 김굉필은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일컬으면서, 『소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당시 그가 지은 『독소학(讀小學)』(소학을 읽다)이라는 시(詩)에는 『소학』에 대한 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從此盡心供子職 區區何用羨輕肥
글공부는 아직도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지만,
『소학(小學)』의 책 속에서는 어제의 잘못을 깨닫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하여 자식 노릇 하고자 하니,
어찌 구차하게 부귀 따위를 부러워하리.
- 권별, 『해동잡록』 「김굉필」
이처럼 『소학』을 통한 수기(修己 : 자신을 닦다)에 열중한 김굉필을 두고 스승인 김종직은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면서 극찬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김굉필은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소학』 외의 다른 유학 서적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김굉필은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야 종9품인 남부참봉(南部參奉)의 말단 관직에 나아가 벼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뒤이어 군자감주부 → 사헌부감찰을 거쳐 정5품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1498년에,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돼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당했다가, 2년 후 다시 전남 순천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무오사화는 신진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에 대해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 세력이 대반격을 가한 사건이었습니다.
훈구파 세력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사초(史草 : 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에 올라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몰아세워 사림파를 크게 탄압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무오년(戊午年 : 1498년)의 사화(戊午士禍)입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김종직 이후 중앙 정계로 진출해, 유교적 정치 이상과 목표를 실현하고자 한 김굉필 등 사림 세력에게 크나큰 시련과 고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김굉필은 마냥 좌절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당시 그는 평안도 희천 유배지에서 훗날 조선 사림파와 성리학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바로 조광조를 만나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한 훈구파는, 오히려 김굉필에게 조광조라는 거목(巨木)을 가르칠 시간적 여유를 준 셈입니다.
이렇듯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전수받은 성리학과 사림의 계보를 조광조에게 온전히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기 사림파들은 김굉필을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계승자로 숭상하는 한편 '동방5현' 중의 한 사람으로 치켜세웠던 것입니다.
정암 조광조와 기묘사화
조광조는 어천찰방(魚川察訪)이라는 벼슬을 산 아버지의 부임지로 유배 온 김굉필을 만나면서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됩니다. 김굉필은 전남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기기 전 2년 동안 평안도 희천에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했습니다. 이때 조광조는 김굉필의 고고한 인품과 높은 학문 그리고 해박한 지식에 빠져들어 밤낮을 잊고 공부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사림파들이 사화(士禍)를 겪은 직후여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성리학을 '재앙을 부르는 학문'이라고 하며 멀리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조광조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화태(禍胎)', 즉 재앙을 품고 있는 존재라며 손가락질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굉필이 갑자년(甲子年 : 1504년)의 사화 때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므로, 주변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은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더욱 열심히 독서하고 학문을 연구했습니다.
조광조는 반정(反正)을 통해 연산군(燕山君)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해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훗날 뜻을 함께 할 많은 동료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로부터 5년 후(1515년)에는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 뒤 전적 감찰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그는 반정공신(反正功臣)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됩니다. 중종은 당시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조광조의 힘을 빌려 반정공신과 훈구파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가 품은 뜻과 이상은 중종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원대했습니다. 조광조는 반정공신과 훈구파의 힘을 약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중종과 뜻을 함께 했지만, 결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을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 혹은 이상 사회로 개조하려는 거대한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국왕조차도 자신이 이상으로 삼은 성리학적 도학정치(道學政治)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종의 후원 아래 조광조는 사림파를 중앙 정계로 적극 등용하면서, 자신이 내세운 성리학적 도학정치를 하나 둘씩 실행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학문과 사상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사회의 풍속과 풍습 역시 점차 성리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광조는 조선 8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보급하는 운동을 펼쳐 향촌사회를 성리학의 이상과 질서에 맞게 개편해 나갔습니다. 또 주자의 『가례(家禮)』를 지키게 해 가정에서부터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성리학의 예법과 풍속에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곧 조선을 성리학의 이념과 질서를 지키는 나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 구상과 정치 행동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일삼은 반정공신과 훈구파들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반정공신과 훈구파 세력은 조광조 등 사림파들이 폐위된 중종의 왕비 단경왕후의 복위문제와 공신들의 훈작(勳爵)을 삭제하는 문제를 제기하자, 일대 반격에 나서게 됩니다. 그들은 '주초위왕(走肖爲王)' 곧 조씨(趙氏 :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와 모함을 뒤집어 씌워, 조광조와 사림파를 몰아세웁니다.
이때 중종은 훈구파의 권력 전횡도 못마땅했지만, 지난 몇 년간 조광조가 보인 도학정치에 대해서도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임금까지 가르치려는 조광조의 독선과 사림파의 독주(獨走)에 대해서는 염증까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가 당파를 조직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 등 훈구파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핵심 인물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성균관의 생도를 포함한 1천여 명의 유생(儒生)들이 석방을 탄원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위는 오히려 중종과 훈구파의 사림 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결국 중종은 훈구파 세력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이 사건은 기묘년(己卯年 : 1519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기록됩니다. 이로써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파들이 벌인 '급진적인 정치·사회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조선 사회 곳곳에 뿌려놓은 성리학의 씨앗은, 선조(宣祖) 이후 사림파가 중앙 정치무대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는 데 큰 밑거름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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