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험한 벼랑 선반처럼 달아 만든 길…영남~한양을 잇던 국방의 요충 <29> 토끼비리 | |
2013.07.23 01:00 | ![]() ![]() ![]() ![]() |

새재는 영남과 한양을 잇던 영남대로였다.
부산 동래에서 낙동강을 따라 대구와 구미를 거쳐 문경에 이르는 영남대로 구간에는 문경 남쪽의 관갑천, 밀양의 작천, 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 용추 부근,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左岸), 양산의 황산천 등 모두 5곳의 천도(遷道ㆍ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가 있었다.
이 가운데 토끼비리라고 불리는 관갑천은 오정산 자락을 돌아 문경새재로 이르는 길로 ‘토끼가 다닐 만큼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른 명칭으로 곶갑천, 토천, 토잔 등으로 불린다. 2007년 길 문화재 최초로 명승으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문경새재에서 남쪽으로 15km 거리에 있는 토끼비리는 이름도 사연만큼 많은 곳이다. ‘비리’라는 말은 ‘벼루’라는 문경지역 사투리로 벼랑과는 구별된다.
토끼비리는 벼랑에 만들어진 길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길이다.
◆꼬불꼬불 양 창자 닮은 토끼비리

조선시대 묵객들은 ‘관갑잔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잔도(棧道)란 강가의 험한 벼랑부분의 선반처럼 달아서 만든 길을 말한다.
조선초기 문장가 별동(別洞) 윤상(尹祥ㆍ1373~1455)은 “험한 산길은 양 창자와도 같고 위태로운 봉우리 말귀처럼 기이해 한 뼘 나갔다가 다시 돌아서야 하니 조심해서 더딘 것을 탓하지 마소서”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ㆍ1420~1488)은 “꼬불꼬불 양 창자 같은 길이며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키도 하여라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라고 토끼비리의 험한 길을 표현했다.
이렇게 묵객들은 한결같이 위험하고 구불구불하고 지나다니기 어려운 구절양장을 생각나게 하는 길의 험준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힘이 든대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나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토끼비리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관갑천(串岬遷)이라고 불리는 토끼비리에 대해 “관갑천은 용연 동쪽에 있고 토천(兎遷)이라고도 부른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시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그 북쪽에 고모산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여러 계곡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라서 벼랑을 따라 잔도를 열어 인마가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로는 깊은 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길손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견탄이다. 견탄은 호계현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며,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곶감원터 아래에 있는 약 2km되는 토끼만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벼랑에 난 좁은 길이다. 태조가 신라를 치러 가는데 이곳에 길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 토끼를 따라 길을 찾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새재와 함께 국방의 요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