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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 안향 백이정 권부 이제현 주도 ★

장수골 2010. 11. 3. 19:12

 1.  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안향 백이정 권부 이제현 주도

 

   성리학이 원나라에서 처음 고려로 전래된 것은 서기1298 8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과 유학제거(儒學提擧) 지내고 첨의참리(僉議參理)였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 연경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입.필사하여 1299년에 돌아온 경우와

 

충선왕을 같이 호종한 권부(익재공 장인)의 아들 준 주자사서집주를 구입하여 돌아와  권부가 간행하기를 건의한 것이 최초의 일이며,

 

이재 백이정(운와공 장인, 익재공 사돈) 역시 충선왕을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성리학을 접하여 배우고 연구하여 서기1308년 충성왕과 함께 귀국하여 치암 박충좌, 익재 이제현, 담암 백문보 등에게 소개하고 가르친 것이 효시이다.

 

    안향의 건의로 충렬왕30년인 서기1304 5 1(壬子日)에 국학에 섬학전을 설치하였고 공자와 70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고 제기, 악기, 육경제자사기를 사들였으며 이산과 이진(동암공 익재공 선친)을 경사교수도감사 (經史敎授都監使)에 임명하기를 청하였고 6월에 대성전을 준공하였다.

    따라서 안향과 권부 초기 성리학의 전래와 유학의 부흥발전에 큰 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고려 성리학의 정치적 수용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는 정치적으로 권문세족이 부원(附元)하고 불법적 수탈과 매관매직을 자행하여 왕권을 약화시켰는데

  신라 때부터 민중에 깊이 뿌리 내린 불교가 너무 타락 하였고 오랜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경제적 폐해는 새로운 사조의 사상인 성리설을 수용하는데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당시 과거를 통하여 새롭게 등장한 신흥사대부 집단은 유교적 학문의 소양을 구비하고 좌주와 문생의 관계로서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수용하고 이들 권문세족을 타도하는데 선봉이 되었으며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개혁정책에 깊숙히 관여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펴 나갔다.

 

 처음 유경(柳璥)의 門生인 안향(安珦)과 이존비(李尊庇), 원부(元傅), 허공(許珙) 등과 백이정, 권부, 우탁, 신천, 윤선좌, 이조년,  박전지, 이진(익재공 선친), 안석, 김태현, 조간, 김륜(익재공 사돈), 백원항, 최성지 등은 성리학과 유학의 발전을 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이들의 문생으로 이제현, 박충좌, 백문보, 이곡(익재공 문생), 박원계(익재공 사돈), 최문도, 최해. 민사평, 한종유, 권준, 전신, 홍언박, 이암, 윤택, 박보, 이인복, 안축, 안보, 김광재, 김광철, 김영돈 등의  인물들이 대부분 과거를 통하여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  신흥사대부로서 하나의 정치집단을 형성하였으며

 

 閔漬, 吳潛, 高世, 朴連, 崔安道, 康允忠, 申靑, 裵佺, 申時用, 金之鏡, 朴仁壽, 高謙, 梁載, 祖倫, 李靑, 朴靑, 奇氏一家 등의 부원권문세족과 부정축재및 인사권의 폐단을 일으킨 원흉들의 척결에 앞장 섰고 자주적인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공민왕을 보좌하고 왕권을 강화 시켰으며  개혁의 선봉에 서서 보다 적극적인 성리학 보급에 앞장 섰다

 

 3. 학문적 연원도

 

안향 유경(柳璥)의 문생이고 안향의 문하생인 국재 권부(菊齋 權溥)는 유경의 손서이다.  이제현은 권부의 사위로서 문하생이고 백이정의 문하생이기도 하며 그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백이정의 사위이다.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하생인 동시에 사돈간이다

 

담암 백문보(淡庵 白文寶)는 백이정과 족친이며 그의 문하생으로 이제현과는 권부와 백이정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동시에 이제현이 좌주(座主)로서 또한 그의 문생(門生)이다.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부자는 이제현의 문생으로 모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문생과 동문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초기 주자학은  朴忠佐, 李齊賢(익재공), 白文寶, 李仁復, 李穀(목은 선친)朴元桂(익재공 사돈), 權準(국재공 아들), 崔元遇, 崔文度, 全信, 韓宗愈, 盧承官,  尹澤, 金진, 洪義孫, 朴珤, 宋天鳳  崔宰, 閔思平, 安軸, 朴仁幹, 崔瀣, 安輔, 朴理, 安震, 金光載金光轍, 李巖, 李達尊(익재공 아들), 朴尙衷, 鄭樞, 李誠中(국당공 아들), 李集, 崔龍甲, 李崇仁柳伯濡金九容, 尹紹宗, 李茂芳, 洪彦博, 田祿生, 金得培, 金希祖(익재공 사위)許伯, 金永旽, 李公遂 , 黃石奇, 安牧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발전하였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대에 이르러 權近(국재공 증손), 鄭夢周, 鄭道傳, 李種學(목은공 아들), 河崙, 吉再, 金自粹, 孟思誠, 朴宜中, 劉敞, 柳伯濡, 卞季良,李文和, 李擔(익재공 증손),  李種德(목은공 아들), 趙愼, 沈溫, 朴仁乙, 宋文中,  閔安仁, 李養中, 趙瑚, 李愚, 鄭可宗, 李廷甫, 廉廷秀, 李種善(목은공 아들), 金潛, 李存吾(석탄공), 李升商(국당공 증손), 金時用, 趙浚, 權思復, 權仲和,  成士達金震陽, 申君平(소부윤공 부인 외조부)李達衷(국당공 아들), 曺信, 韓脩, 文益漸, 李岡, 高慶, 魯舒, 廉興邦, 閔霽. 韓公義, 李資乙, 河乙沚, 李仁任,  禹玄寶, 金敬直, 金仁琯, 鄭習仁,  元天錫, 廉國寶, 柳淑, 李靭, 安乙起, 安景恭, 安宗源, 安元龍, 柳亮과 같은 신흥사대부들에 의하여 더욱 활발히 연구되고 발전 되었다.

 

         *정도전의 삼봉집 序文  

양촌 권근(陽村 權近 " 吾家文正公 始以朱子四書  建白刊行 勤進後學 其甥益齋李文忠公 師事親炙 以倡義理之學  爲世儒宗 稼亭,樵隱諸公 從而興起 淡庵白公 闢異端尤力焉  吾座主牧隱先生 早承家訓 ....

         儒士皆宗之.

 

 1. 圃隱 정몽주학통연원도 

 白文節(백이정 선친)- 李尊庇(백문절공이 외삼촌) - 蔡洪哲 - 金得培 - 鄭夢周     - 金叔滋

      < 고려사 김득배 卒去 관련 참조 >

  

2. 고려말의 사대부는 대부분 別洞 尹祥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자료의 미비로 그 학문적 연원을 소상히 밝히지 못함이 아쉬운 일이다.

 

3. 冶隱 길재(吉再)의 학문적 연원은 정포은의 문인이 아니라 양촌 권근과 목은 이색의 문인임은 명백한 일이다. 포은 문집에 길재가 문인인 기록은 없으며 길재와 권근은 서로가 사제간임을 명시하였다

     < 포은문집, 목은문집, 야은문집, 양촌집 참조

 

4. 益齋 이제현 치암 박충좌와 함께 이재 백이정의 문인이라고 하였으며 그가 직접 서술한 그의 장인인 국재 권부의 묘지명을 참고하면 "그 사위요 스승으로 모신지 어언 47년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백이정이 충선왕을 따라 원에 갔을 때가 서기1298년이고 고려로 다시 귀국한 것이 1308년이었는데익재의 년보에 28세인 1314년에 백이정의 문하생이 되어 수업한 것으로 기록 하였다.

  그는 이미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 등의 문인과 사귀며 충선왕의 만권당에서 학문적 토론을 하였으며이어 1316, 1319, 1322년 세차례나 원에 간 기록이 있다.

 

  고려말의 정치적 개혁을 배후에서 주도하였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으며 이색이 찬하기를 " 도덕의 元首요 문장의 正宗이며 태산북두와 같기는 韓退之(한유)  光風霽月은 주염계(周廉溪-주돈이)와 같다고 극찬하였다.

  안축, 이곡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수 하였고 백문보, 이달충(국당공 아들)과 함께 자신의 사가에서 고려 국사를 찬수하기도 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관대한 편으로 후학의 비판을 받았다.

 

 5. 牧隱 이색은 그가 지은 여러 묘지명에 학문의 연원을 스스로 밝혔는데 그는 익재 이제현의 문생이며 초은 이인복복재 한종유, 급암 민사평, 형재 이공수, 송당 김광재, 행촌 이암父인 가정 이곡, 율정 윤택에게서 직접 배웠고 이곡의  同年인 담암 백문보에게서도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의 정치적, 학문적 종장이며 정포은, 이도은과 함께 高麗三隱으로서 성리학의 조종사(祖宗師)라 칭했으나 평소 우유부단하고 불교에 관심이 많아 후세의 지탄을 받았다.  

 

6. 樵隱 이인복그의 묘지명과 담암 백문보의 문집, 초은집, 목은집 등에 의하면 안향의 高弟인 덕재 신천과  송재 권준, 익재 이제현, 이재 백이정의 문인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이재 백이정이 경남 남해로 귀양가서 卒한 시기가 서기1323(충숙왕10) 12월로서 당시의 이인복 나이가

  16세 정도이니 그 보다 몇년 일찍 귀양간 백이정에게 성리학을 배웠다는 것은 후세의 가필이 아닌가 의심 되는  바이다.

  양촌 권근은 그를 국제 권부의 문인이라고 적었다. 이색이 문장의 정종(正宗)이며 익재의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였다고 하였으며 호정 하륜은 박학다식하다고 평했다.

  안진, 안축, 이곡과 함께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을 찬수하였으며 품행이 엄숙하고 헌거(軒擧)하였다

 

7. 淡庵 백문보는 처음 역동 우탁에게서 역학을 배웠고 곧 국재 권부와 동종인 이재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익재 이제현을 座主로 하는 문과에 급제하여 그의 門生인 동시에 동문이었다

 또한 근재 안축의 문하에서도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다. 역학에 정통하고 강력한 척불론을 주장 하였으며 정치도감사로서 공민왕대 개혁정치의 선봉에 섰다.

 문장을 잘 짓고 청렴결백 하였으며 史官으로서 목숨을 건 직필을 서슴치 않았다

 이제현, 이달충과 함께 익재의 사가에서 고려 국사를  찬수하기도  하였으나 마치기도 전에 홍건적의 난으로 모두 산일 되었다.

 

 8. 及庵 민사평은 이색이 찬하기를 " 자품이 청수하고 학문이 정민하며 문학이 넓고 행검이 돈독했으며 성리학에 힘쓰고 후생을 길러 사문(斯文)을 흥기함에 학사.대부가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렀다"라고 평했다.

 

 9. 一齋 권한공의 학문적 계통은 하나의 거대한 학단을  이루었으나  심왕인 고를 세우려 하였다가 일이 성사 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하여 그 문하임을 모두가 숨겨 자세한 자료가  전하지 못한다.

 

10. 謹齋 안축은 동생 안보와 안집 삼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안보와 함께 원제과에 합격하여 안동권, 성산이씨, 경주이씨 등과 함께 고려말 최대의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쾌헌 김태현과 동암 이진의 문하에서  수업 하였고  용모와 풍채가 근엄하고 언행이 방정하였으며 평생을 근검하게 생활하여 당시 사대부의 모범이 되었다.

 이제현, 이곡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수, 안진, 이곡, 이인복과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실록을 찬수함.

 

11. 菊齋 권부는 趙簡과 함께 朴恒의 문생이며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 간행을 건의하였으며 후진양성과 성리학 보급에 공헌을 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력과 구봉군가(九封君家)로 유명하며 그의 아들 권겸(權謙)이 기철과 난을 일으켜 주살 되고 가문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사위인 이제현 당시 권력을 장악한 문생들의 힘으로 멸문의 화를 면했다후손인  陽村 權近과 止齋 權제, 一齋 權採, 梅軒 權遇所閑堂 權擥 같은 인물이  조선조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고려사 열전에 이르기를 < 朱子四書集註建白刊行 東方性理之學 自溥倡註銀臺集 ...孝行錄 著行于世...> 라고 함.

 

12. 稼亭 이곡은 안축에게 배웠고 익재 이제현을 좌주로  그 문생이 되었다.

    문장이 유창, 아담 하였으며 그 뜻이 오묘하였다.이제현 , 안축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수 하였고  안진, 안축, 이인복과 함께 충렬 이후의 3조 실록을 찬수하였으며 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13. 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시기와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간 년대와 누가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래하였는가에 대하여  여러가지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안향이 원에 간 시기를 서기1298 8월로 봄이 가장 타당하다.

 

 충렬왕24 1월에 세자인 충선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는데 다시 8임신일에 사신 발로올이 국왕의 인신(印信)을 빼앗아 전왕인 逸壽王 충렬에게 돌려주고 충선왕을 원나라로 소환 하였고 원나라 성종(成宗)이 힐문하되 그곳 승상이 호종한 신하 중에 우두머리가 대답하라 하니 첨의참리 (僉議參理) 안향이 대답하였는데 성종이 적절한 대답에 탄복하고 더 이상 충선왕을  문책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충렬왕25 9월에 안향을 수국사 (修國史)에 임명한 사실, 1299 5월에 장군 백효주(白孝珠)가 원나라에 새매를 받치러 간 것은 그의 형인 백이정을 만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안향은 1243년생인데 당시 56세로 첨의참리였고,백이정은 출생년대가 명확치 못하다.

 그의 동생이 당시 장군이면 적어도 백이정 1260년 前後生이며 그의 장인인 김순(金恂) 1258년생이니 1270년 前後生이 되어야 하는 모순이 있다.

 

 백씨구보에는 백이정의 출생시기를 1247년 정미년으로 기록하고 1275(충렬왕 원년)에 韓康과 朴恒을 좌주로 하는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는데 권부의 부친인 권단(權단)의 열전에 의하면 <判衛尉寺事 掌試取士多知名士權漢功, 金元祥 崔誠之, 蔡洪哲, 白이正 後皆爲名相...>이라 하였으니 백이정은 충렬왕10(1284) 10월에 치러진  지공거 金周鼎, 동지공거 권단의 문과에서 趙宣烈,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과 급제한 것으로 보면 서기1267년생으로 32세에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으며 만 10년 뒤인 1308년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로 남해에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1323 12월에  57세의 나이로 졸한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고려사 열전 안향의 記에 < ....僉議參理忠宣卽位拜參知機務行東京留守  集賢殿大學士 鷄林府尹 復爲參理 及忠烈復位  忠宣如元珦從行...興學養賢爲己任...建議置 贍學錢...>

 

      열전 白文節 記에

  <子이正 孝珠. 이正 僉議評理 商議會議都監事 後封 上黨君 時程朱之學 始行中國 未及東方 이正在元得而  學之東還 李齊賢 朴忠佐 首先師受 ...>의 내용을  참고하면 성리학을 최초로 원에서 전래한 사람은 안향과 이며 백이정은 직접 배워와서 그 후에 가르쳤고 권부와 이제현은 많은 문인을 배출하고 부흥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http://cafe.daum.net/chunghokong/4ATt/69?docid=1EbRe|4ATt|69|2009021314160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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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남지리답사
글쓴이 : 松河 李翰邦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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