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운양집(2020 .4 .3)

장수골 2020. 4. 3. 22:04


운양집 제13권        

 행장(행장) 부(부) 가장(가상) 행록(행록) 모두 11편인데 9편을 수록하였다.
증 좌찬성 별동 윤공 행장〔증좌찬성별동윤공행상〕

선생의 휘(휘)는 상(상), 자는 실부(실부), 호는 별동(별동)이며, 초명(초명)은 철(철)이다. 그 선조는 예천군 사람이다. 증조부 휘 충(충)은 예빈시 소윤(예빈사소윤)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신서(신서)는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선(선)은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집안이 대대로 한미(한미)하여 향리에 드러난 가문이 아니었으나, 참판공의 성격은 공손하고 신중하며 덕을 좋아하여 늘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공수(공수)하며 경의를 표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어르신이라 일컬었다.
선생은 홍무(홍무) 6년(1373) 계축 10월 10일생으로 어려서 총명하고 절륜하여 8, 9세에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다. 관아의 향리(향리)로 일하면서 종일 심부름을 하고 여가가 있으면 정좌하여 책을 읽었고 밤에는 반드시 관솔을 모아두었다가 불을 밝혀 새벽이 될 때까지 글을 읽었다. 사자(사자)와 육경(육경) 및 모든 성리학에 관한 책을 가져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스스로 터득하려 하였는데 특히 역학(역학)에 조예가 깊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을 이루었다.
태조 원년 임신년(1392)에 생원(생원), 진사(진사)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당시 나이가 20세였다. 병자년(1396, 태조5) 을과(을과)로 급제하였고, 이때부터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세상에 선생과 스승의 자리〔고비〕를 다툴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앞뒤로 10여 년간 교수(교수)로 학교를 주관하였고, 문임(문임)으로 20년 동안 국자감의 장〔대사성〕을 맡았다.
세종 3년(1421) 문종(문종)께서 동궁(동궁)으로 있으면서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선생께서 겸대사성(겸대사성)으로 박사(박사)로 있었다. 동궁께서 유생(유생)의 옷을 입고 속수례(속수례)를 행하고 당(당)에 올라 《소학(소학)》을 받았다. 본조의 입학하는 예절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선생이 좌보덕(좌보덕)으로 자리를 옮겨 나아가 《주역》을 강하였는데, 강의를 마치니 모든 생도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주도록 주청하니 임금께서 명하여 예전같이 그대로 성균관 대사성을 겸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께서는 항상 성균관에 계시면서 오로지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는 것만을 일삼으며 개연히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육성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여러 학생들을 엄격하면서도 은혜롭게 대하였다. 어떤 사람이 “여러 생도들이 산에 놀러가서 선생을 비난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듣고서 넘겨 버리고 조금도 화난 안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학생들이 더욱 감동하여 분발하고 힘써 규정을 범하지도 않고 잘못을 숨기지도 않으며 모두 도덕으로써 스스로 힘썼기 때문에 한 시대의 큰 선비와 이름난 석학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당시는 나라의 풍속이 고려조의 불교를 숭상하는 폐단을 고치지 않았던 때였다. 선생께서 지금이라도 그릇된 구습(구습)을 통렬하게 씻어버리지 않는다면 후세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고는 1437년(세종19) 성균관의 여러 생도들과 함께 상소(상소)를 올려 불교를 숭상하는 잘못을 논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태조) 강헌대왕(강헌대왕)께서 창업하시던 초기에는 이익이 되는 것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해(해)가 되는 것을 개혁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부처를 섬기는 조항만은 잘못을 그대로 계승하여 나라 안에 절을 짓고 탑을 조성하고 능묘(능묘)를 안장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성신(성신)께 유감이 없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공정대왕(공정대왕 태종)께서 영명(영명)하시고 옛것을 숭상하는 자질과 정일하고 빛나는 학문으로써 도(도)의 진수를 통찰하시어 부도(부도)를 무너뜨리고 절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몰수하셨으니, 이는 그 가지와 잎을 점점 마르게 하고 그 근본을 뽑아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선왕의 조치를 잘 계승하고 극히 융성하게 운영하여 성인의 경전(경전)을 숭상하고 믿으셔서 선한 행실을 채집하고 선인(선인)의 말씀을 온축하며 삼강(삼강)을 돈독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신들은 세상이 태평하고 화목하게 되어 도(도)가 크게 이루어져 삼대(삼대)의 정치를 머지않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흥천사(흥천사)의 탑전(탑전)에 금은과 단청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였는데, 명목은 중수한다는 것이었지만 공은 새로 창건하는 것보다 배가 되었습니다. 지금 또 큰 도량(도장)을 설립하여 승도(승도)들을 불러 모아 불경을 외우고 예참(예참)을 거행하여 불교 행사를 크게 벌이시니, 여러 관청이 많은 공물을 마련하여 가지고 와서 보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위로는 종실의 귀척(귀척)과 아래로는 시장의 물건을 파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재물을 기울여 시주하면서 목을 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재물을 허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이 크게 인심을 어지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니 눈물을 흘리며 울 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신)들이 가만히 생각하니, 선만 있고 악이 없는 이치는 비록 하늘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선하게 되고 악하게 되는 기틀은 실로 임금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전)에 말하기를 ‘위에서 무엇을 좋아하면 아래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임금으로 계시면서 불교를 숭앙하고 믿으셔서 아랫사람들에게 길을 열어 보이신다면, 아랫사람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누군들 그곳으로 좇아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불교를 믿게 된다면 부부의 윤리가 없어지고 생명이 태어나는 원천이 끊어져 100년 후에는 인류가 거의 없어질 것이니, 산천과 구릉에는 초목과 금수(금수)만이 있어 세상에 인적이 끊어질 것입니다. 요즘에 전하께서 지나간 옛것을 찾아 모으셔서, 후일에 권장하고 훈계할 것에 대비하여 《치평요람(치평요람)》을 저술해서 후세에 전하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신들은 양(양)나라 무제(무제)처럼 불교를 섬기는 데 부지런한 사람을 권장하려는 뜻을 보여주시려는 것인지, 경계하려는 뜻을 보여주시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글이 올라가니, 대신 유정현(류정현) 또한 능(능) 근처에 절을 세우는 법을 혁파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부처를 받들어 복을 비는 모든 종류의 일들을 차례로 혁파하여 성종 때에 이르러 남김없이 모두 폐지하게 되니, 논자들이 선생의 소(소)가 실로 그러한 일이 시작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하였다.
세종께서 일찍이 공법(공법)을 시행하여 연분(연분)은 9등으로 하고 토지는 3등으로 나누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백성들이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선생께서 가뭄으로 인하여 진계(진계)하여 말씀하시기를 “용자(용자)가 말하기를 ‘토지를 다스리는 데 조법(조법)보다 나은 것이 없고, 공법(공법)보다 좋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제(전제)는 태조 이래 ‘급손수조법(급손수조법)’을 처음 시행하여 민심과 국가의 근본이 편안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손실(손실)에 따라 조세를 거두는 것으로 옛날 조법의 그대로입니다. 지금 공법(공법)으로 고쳐서 법을 만들고자 하는데, 비록 연분(연분)을 9등으로 하고 전분(전분)을 3등으로 하더라도 총 토지 수는 각각의 토지에 손실을 가감한 평균치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여 높낮이가 가지런하지 못하여 비록 같은 도, 같은 읍, 같은 면, 같은 리의 같은 토지일지라도 비옥도가 각각 다르니, 연분의 등급에 따른 총 토지 수에 따라 조세를 정하면 다과(다과)가 균등하지 못하여 반드시 백성들의 원망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변진(변진)에 성을 쌓는 잘못을 논하여 말하기를 “‘천시(천시)는 지리(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인화)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을 쌓은 일로 황해도와 강원도의 백성들이 매년 양식을 싸서 들판에서 노숙하거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천재(천재)가 또한 이와 같으니 중지하고 풍년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무인년(1458, 세조4)에 단종이 성균관에 입학하려 하자 임금께서 선생께 명하여 다시 박사(박사)가 되도록 하여 위에서 서술한 원손(원손)의 스승으로서의 예를 받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성균관 입학에서는 대제학이 관례대로 박사가 되었다.
문종 원년 경오년(1451) 선생은 나이 78세로 연로하였음을 아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금께서 승정원(승정원)에 명하여 술을 내리고 매년 쌀 20곡(곡)을 하사하도록 하시고, 이어서 거주지의 관리에게 매달 음식물을 보내도록 명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은퇴한 원로 재상(재상)에게 음식물을 보내도록 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때에 사방의 학자들이 선생께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구름같이 모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께서 이들을 가르치시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한결같이 성균관에 있을 때처럼 하였다.
1454년(단종2) 대사헌 권준(권준)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윤상(윤상)은 전하께서 집지(집지)하여 스승의 예로써 대우한 자입니다. 지난 번 연로하였다고 하여 사임하고 물러났지만 기력이 아직 건강하고 총명이 감소하지 않았으니 다시 성균관으로 보내 유생들을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나, 선생께서 거듭해서 늙어서 부임하기 어렵다고 하니 마침내 중지되었다. 을해년(1455, 세조1) 3월 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3세였다. 군(군)의 북산(북산) 갑향(갑향)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후에 의정부(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아울러 관례대로 하였다.
융경(륭경) 원년인 정묘년(1567, 명종22)에 중국 사신 허국(허국)과 위시량(위시량)이 우리나라에 공자와 맹자의 심학(심학)과 기자의 주수(주수)에 뛰어난 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퇴계(퇴계) 이황(이황) 선생이 고려의 우탁(우탁), 정몽주(정몽주)와 본조의 김굉필(금굉필), 정여창(정여창), 조광조(조광조), 이언적(리언적)과 선생을 적어서 보여 주고 글로 써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신라와 고려가 있을 때 문헌의 나라라는 칭호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시대의 유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끝내 언어와 문자 사이에 있었습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정자와 주자의 책이 나오자, 우탁과 정몽주 같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본조(본조)에 이르러서는 선비가 암송하고 익히는 것이 공자와 맹자, 정자와 주자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혹 습속에 젖어 예전의 것을 그대로 따라 밝히지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였으며, 혹은 뜻만 크고 일에는 거칠어서 이용할 줄도 모르고 비판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중에 뛰어나게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개연히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종사한 자는 지금 거론한 몇 분이니, 어찌 심학(심학)의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다.
또 이희(리희)에게 답장한 편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윤(윤) 선생은 성리학의 연원으로 점필재(점필재)와 사가(사가) 및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책에서 지칭되고 있다. 그 분들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을 취함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퇴계 선생께서는 후학들의 표준인데, 그가 선생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 곧 이와 같았으니, 이 당시 사람들은 선생에게 미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선생께서 아름답고 밝은 시대를 만나서 경술(경술)과 문장(문장)으로 학교를 고무시켰지만, 선생의 논저가 없어 후세 사람들이 고증할 수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가장 높은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그 다음이 공을 세우는 것이고 그 다음이 말을 세우는 것인데, 말을 세우는 것은 선비로서 부득이한 것이다. 선생이 오랫동안 스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하여 인재를 가르치고 길러서, 그의 덕(덕)과 공(공)이 만세에 드리우는 것은 구구하게 말을 세우는 자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고려의 선비는 한갓 문사(문사)를 숭상하였으나, 포은 정몽주 선생이 비로소 성리학을 창도하고, 선생께서 그 학문의 실마리를 얻어 국초(국초) 선비들의 추향(추향)을 바로잡아 그들로 하여금 순수하게 낙민(락민)의 길로 한결같이 나아가게 하였다. 이런 까닭에 선생의 말씀이 곧 포은(포은 정몽주)의 말씀인 것이다. 강호(강호) 김숙자(금숙자) 선생은 선생으로부터 역학을 전수받았는데 우리나라의 역학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밝아졌다. 점필재(점필재) 김종직(김종직) 선생의 학문은 가정(가정)에서 배운 것인데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 또한 사숙(사숙)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점필재 선생은 한훤당(한훤당) 김굉필(금굉필)에게 전하였고, 한훤당이 정암(정암) 조광조(조광조)에게 전하니 연원이 유래한 바는 대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강호(강호) 이하 여러 선생의 논저(논저)는 바로 윤 선생의 논저인 것이다. 그러므로 점필재 김종직이 선생의 글에 서문을 쓰면서, “선생께서 직접 제자에게 가르치신 말씀의 정수(정수)는 고위 관료나 벼슬하지 않는 학사들에 이르기까지 책에 기록하고 전하여 외우지 않은 자가 없었다. 지금 이 잔편단간(잔편단간)이 전하지 않더라도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참으로 제대로 알고 하신 말씀이다. - 이력(이력)과 자손에 대한 기록은 모두 일단 생략한다. -
아아, 선생의 관리로서의 업적과 덕망이 태평성대를 만났으나 여전히 절혜지전(절혜지전)을 받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러 잊혀져가니 공론이 모두 개탄하고 애석해 하는 바이다. 오늘 선생의 운손(운손) 모씨가 그 유집(유집)과 연보(연보)를 가지고 도성에 들어와 도소(도소)에서 천술(천술)하고자 하니 그 뜻 또한 부지런하다. 그러나 연대가 너무 멀고 보고 들은 것이 소략하고 오류가 있고 유집과 족보와 묘표를 겨우 주워 모는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 만분의 일에도 부족하다. 그 도학과 문장이 온 세상에 으뜸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회자)되는 사람의 경우에도 종종 국사(국사)나 현인(현인)들의 기록에 산만하게 출현하여 하나같이 충분하지 못하다. 생각하건대 나와 같이 부족하고 비루한 후학의 글이 또한 어찌 찬사가 될 수 있겠는가? 삼가 원래의 글에 행장에 의거하여 약간의 찬술을 더하여 이와 같이 쓴다.

숙부 청은군 가장 기묘년(1879, 고종16)〔숙부청은군가상 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