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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몽주선생 재평가(2017 .10 .27)

장수골 2017. 10. 2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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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선생에 관한  재 평가

 

                                                                                                                                安 喩 齋

 

 

 

정몽주선생 업적에 대한 의혹

 

고려 말 조선초 역사를 고찰하다보니, 정몽주(1337~1392)선생의 업적에 많은 의혹이 있어, 연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무엇보다도 정몽주선생이 자신의 이름을 수차 개명한데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을 대신하여 성장하여 자(字)를 사용하는 경우는 일반적이었으나, 개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럼에도 정몽주선생은 몽란-> 몽룡-> 몽주로 개명하였고,  자(字)로 달가를 사용하였으며, 호는 포은이었다. 당시의 여말 절의파 인물 중 개명을 한 인물은 정몽주선생을 제외하고 찾기 힘들다. 공민왕이 갑자기 살해되고, 우왕 초 이인임 일파가 전횡을 부리며 공민왕이 추진하던 친명에서 친원으로 돌아서니, 정도전 염흥방과 함께 원나라 사신 영접을 반대하다가 잠시(40여일) 귀양 갔던 것을 제외하고 줄곧 양지에서 부귀를 누리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때 주역이었던 가해자 이인임과 피해자 염흥방 정도전 정몽주 일시 천하를 품었다가 모두 역적이 되어 제명을 못 지켰다.

 

포은이란 호와는 정반대의 삶이었다. 정몽주선생이 포은이란 자호를 지어 실질적 스승인 목은에게 기를 부탁하자 목은은 그에게 기를 지어주며, 포은이란 의미는 작은 채마밭을 일구며(圃) 숨어지내는 선비(隱)라는 의미인데, 번화가에서 출세가도를 가니, 포은 이란 뜻과는 다른 삶으로, 후에 "나도 隱字 號를 가진 이들입네하려는 것 아닌가?" 라는 의미 심장한 표현을 한다. 과연 그 말대로 정몽주는 은둔의 삶이 전혀 없음에도 고려 말 삼은으로 칭해지고 있다.   

 

한편, 정몽주선생이 고려 관복을 입고 명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 올 때는 명나라 관복으로 바꿔 입고 귀국하였다. 그 앞서 바로 3~40년 전에 원나라는 고려에 대해 자기들 관복을 입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가정 이곡이 원 세조 때에도 허용하였던 일을 지금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이른바 세조구제(世祖舊制) 논리로 고려의 관복이 유지되었다. 따라서 당시 고려 관복이 원나라 관복이라는 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정몽주선생은 원나라 관복이라며 명나라 관복으로 갈아 입고 돌아 왔다. 설령 원나라 관복이라할지라도 귀국하여 논의를 거쳐 관복을 바꾸는 것이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면을 고려하면 정몽주는 일편단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연구를 시작하여 우선먼저 단심가와 하여가는 실록에서의 내용과 전혀 다르기에 선행연구를 조사하던 중 이미 지헌영 강전섭이 위작으로 논문에서 밝혔다. 미진한 부분은 후학에게 연구과제로 남기었기에 강전섭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원전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정몽주 사후 225년이 지나 심광세의 위작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참조; 정몽주가 단심가를 지었을가?).

 

다음으로 정몽주선생의 생 및 사후를 고찰하였다. 정몽주선생의 충절에 대한 논의는 이미 500년 전에 한강 정구가 그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정몽주선생의 절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조광조 학맥인 퇴계 이황은 선현을 험담할 수 없다며 정구를 단호하게 질책하였고, 그 후로 조선에서 어느 누구도 정몽주선생의 절의에 대한 논함이 없이 찬양일색이었으나 박세체에 의하여 절의가 언급된 사례가 있을 뿐이다.

                                                                               

 

정몽주와 이성계의 관계

 

정몽주는 우왕을 받들며 정당문학 지공거까지 지내 출세의 본거는 우왕이었다. 1364년 이성계의 종사관이 되어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온 후로 이성계와 28년간 같은 노선을 걷다가 불과 7개월 기간에서 이성계의 추종자 정도전 이방원을 견제하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당하였다. 어디까지나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이성계의 충복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오래 함께한 정도전과 밀착되어 이성계의 상관인 최영장군을 참수하고, 그동안 14년간 자신이 섬겨왔던 우왕을 교체하고 그 아들인 창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1389년(창왕 2년)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음에도 다음 해에는 창왕까지 내치고 이성계의 조카 사위인 신종의 6세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요를 왕으로 세우는데 맨 앞장을 섰다. 1389년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되었다.

                                                                                 

 수아비 공양왕 옹립에 정몽주가 앞장 

                                

정몽주가 앞장선 이른바 폐가입진,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허수아비 왕 (공양왕)으로 세웠는데, 그 방법은 학문한 학자가 아니라 노름판의 투전꾼이었다. 즉, 왕씨 성을 가진 어린이 6명을 놓고 심지 뽑기 하였다. 이성계가 심지를 뽑았는데 자신의 조카사위인 요가 낙착되어 왕으로 삼았다. 요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좋아 하기는커녕 울고불고 하였다. 허수아비 왕으로 바로 해치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기여한 인물 9명 중에 한명인 9功臣에 올라, 이성계는 시중이 되고 이성계 천거로 바로 아래 직급의 守시중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받았다. 이처럼 이성계의 의도를 간파하고 순조롭게 진행시키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공양왕을 옹립한 일파인 오사충 윤소종은 이색이 신씨인 창왕을 옹립 하였다며 처형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공양왕은 장단으로 유배하였으나 이들은 끈질기게 처형을 주장하였다. 

 

그 후 허수아비에 불과한 공양왕은 정몽주를 守시중에서 문하시중급으로 명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우왕 밑에서 정당문학 지공거를 거쳐 굳건한 기반을 다졌으나, 우왕과 창왕을 내치는 과정에서 이색을 따르는 이숭인 길재 변계량 권근 하륜 같은 이들과는 달리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과 함께하면서 신하로서 최고 자리인 문하시중급이 되면서, 더 이상 이성계의 과거 종사관 자리에 머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옹립한 허수아비 공양왕으로 부터 2인자 확보와 죽임                 

                                                                                  

공양왕으로부터 확보한 2인자 지위를 굳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당을 만들어 지지 세력을 결집하는 것이 절실하였다. 이 시기에 이색과 그의 제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공양왕 3년에 이색 이숭인으로 하여금 국조실록을 수찬하려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공양왕 3년 9월 부터 살해되던 다음해 4월 까지 즉 7개월간은 이성계 세력을 압도하면서 같은 길을 걸었던 평생 동지 정도전과 상관이었던 이성계를 견제하여 갔다. 그들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리고 정도전을 체포하여 구금시키고 상소문을 기반으로 사형시킬 날짜를 계산하며, 그 일당을 체포하기 위해 수원으로 집결하도록 하고, 이성계 동태를 살폈다.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이성계의 동태를 파악하러 찾아온 정몽주를 이방원 일당이 뒤쫓아 가 그 집 앞 태묘동에서 살해한 후, 그 머리를 베어 개성 번화가에 한 달 이상을 매달아 놓고 역적의 죽음이라고 알리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체 또한 함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정몽주의 시신을 변계량이 수습하였다는데 확실치 않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처형 직전에서 구출되었다. 생사를 오간 정도전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서며 고려의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한 후에,  1392년 7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직함은 권지고려국사였다. 이성계는 왕위 취임 첫 일성으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다고 밝혔다. 왕이 왕씨에서 이씨로 바뀐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정몽주가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키며 조선 건국을 반대하였다는 주장은 사실과 달리 권력 게임에서 이방원의 비겁한 행위로 패한 것이다. 조선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다는 말도 식민사관 업자들이 지어낸 말이다. 왕이 된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삼았으며, 독실한 숭불자였다. 물론 정종 태종 세종 문종 세조 등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고 왕실은 물론 대신 및 기층민들도 종교는 불교였다. 극소수 중앙 관리만이 이데오르기로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러니 크게 잡아 본다하여도 전체 인구 중 불교를 적극 배척한 이는 불과 서너명 미만이었다. 물론 정도전도 귀양살이 이전에는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의 외조부가 승려였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시일이 경과하여 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정도전이 조선이란 국호를 지었다고 하나, 명나라에서 지정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정도전의 인간 됨됨이로 볼 때, 왕조를 바꾸고 옛 조선을 택했을리 만무하다. 정도전이 설치며 이방원을 배신하고 9살짜리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아 세자의 사부가 되었다. 차 후에 왕위에 오르면 자신이 2인자로서 권력을 잡기 위해 신권론을 주창하며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 왕자들을 권력에서 제외시켜 외방으로 내 쫓고 무장해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이방원은 한씨소생 왕자들을 몰살하려 한다며,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휘하 장수 이숙번의 도움으로 정도전 일파를 일망타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씨 소생 세자 방석을 살해하자 이성계는 왕위 자리를 버리고 함흥으로 갔다. 잠시 자기 형 방간 (정종)을 왕위를 앉혀 놓았다가 이윽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형제 살육을 통하여 얻은 자리기에 영광스럽지 못했다. 그 책임을 정도전에게 돌리며 정도전에 대한 원한에 시달렸다. 정도전이 서얼 출신임을 들어 서얼들이 정가에 얼씬도 못하도록 서얼차대를 법제화하였다.                                               

 

                                        역발상으로 정몽주를 충신으로 

                                                                                                                                                      

이성계가 두 정 즉 정몽주와 정도전이 아니었다면 조선을 이룰 수 없었다고가 증언한 기록이 태종실록에 분명하게 있다. 이 증언에서 처럼,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공양왕을 내세워 실질적으로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은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이 이들 두 정을 모두 죽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정몽주를 죽인 것은 정도전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 그런 정도전의 배신으로 속앓이를 하다 정도전을 해치우고 형제간의 살륙을 거쳐 왕위에 올랐으니, 불명예스런 가운데 왕위의 절대 권위를 찾아야만 했다. 그게 바로 역발상으로 정도전을 살리기 위해 죽었던 정몽주에 대해, 정몽주가 자기 아버지 이성계에게 보였던 충성심을 현창하는 것이었다. 

 

태종 1년에 정몽주에게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殿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에 추증하고, ‘文忠’의 시호를 내리고 후손을 찾아 내어 정몽주의 문집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정몽주와 자신 이방원이 나눴다는 오직 둘만이 알 수 있는 일명 하여가와 단심가는 어디에도 없다. 조선에서 개인의 문집을 국왕명으로 간행하게 한 것은 정몽주 문집이 처음이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왕명으로 정몽주 문집이 간행되었다.  

 

이처럼 영광스럽지 못한 과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번에는 왕위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숙번과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왕권에 도전한다고 그들을 무참히 죽였다. 사유야 어떻든 자신의 왕조를 세운 실질적 충신을 모두 죽이고 말았으니 그 콤프렉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정몽주를 충신으로 내세웠는데 정몽주가 조선 사람이 아니기에 고려의 충신으로 둔갑시키고 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의 군주가 자기가 처형시킨 자에 대해 자기 손으로 충신으로 만든 경우는 없다. 설령 그렇게 할려면 자신의 행위가 잘 못되었썼다는 것을 시인한 후에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을 제쳐두고 자신의 왕조를 세우는데 반대자로 자신이 죽여 버린 정몽주를 충신으로 삼았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기에 그러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여야 진의를 알 수 있다.       

                                                                                                                  

그 아들 세종은 정몽주를 충신 얼굴로 그리고 그에 대한 찬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당시 정몽주를 본 사람은 없었으니, 정몽주 본래 얼굴이 아님은 틀림없다. 세종 14년(1432)에 「三綱行實」 忠臣傳에 실었고, 손자인 문종 (2년, 1452)은 숭의전에 배향하고 정몽주의 증손인 정윤정(鄭允貞)을 관직에 임명시켰다. 이제 와서 자신들이 엎어버린 고려의 충신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 조선을 세우는 충신이었음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몽주를 지속적으로 충신으로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서 정몽주가 우왕을 섬긴 것을 문제로 제기하였으나, 당시 정몽주는 우왕이 신(辛)씨인 줄 몰라서 그랬다고 죽은 정몽주를 대변하였다. 이처럼 충신만들기를 이어 가니 이에 견강부회하며 줄을 섰다. 정몽주의 충신 운운은 전적으로 푸코가 말하는 압제된 지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조광조 등장과 정몽주 역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은 연산군 치하에서 목숨을 건지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보람으로 잠

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 그 날의 목숨을 두려워하며 지내다가, 연산군 12 (1506년)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중종)으로 앉혀 놓았다. 그 당시 왕으로 앉히기 위해, 진성대군(중종) 집으로 이들이 가자 진성대군은 자신을 죽이려 온 줄알고 자결하려고 하자, 부인이 자결을 하기전에 그들의 동테를 파악하고 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하였다 한다. 그동태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말(馬)이 머리를 대문 쪽으로 향하고 있으면 잡아가 죽일 것이고 말 꼬리가 대문을 향하고 있으면 모시러 온 것이니 이를 문틈으로 보고 자결할지를 하도록 하라고 하여 문틈으로 보니 말 꼬리가 대문을 향하고 있어 모시러 논 것을 알고 문을 열고 나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지어낸 말이겠지만 이처럼 진성대군(중종)은 파리 목숨으로 지내고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이들은 靖國功臣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특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맘대 정사를요리해도 중종은 기를 못 피고 이들 공신들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했다. 또한 왕위를 넘보는 사건이 발생하던 차에 성균관 유생 조광조를 등용시키고 속도전으로 진급시켜 자신의 세력으로 활용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자신의 세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뽑는 천거 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로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 등 28인이 뽑았으며, 이어 김정(金淨), 박상(朴詳), 이자(李耔), 김구(金絿), 기준(奇遵), 한충(韓忠) 등 젊은이를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현량과 실시를 통하여 자기 사람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켜 자신의 세를 확장하는 실마리로 삼고 (하바드대 엔칭 연구소 E. Wagner교수의 연구결과도 이와 같음), 이들 신진 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 새로운 질서는 도학 정치를 내 걸은 성리학이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유불선이 혼재하던 시기로 왕실과 대신들 절대다수가 불교와 도교를 수용하였는데, 이들 훈구파(공신)를 척결하는 소제도구로, 앞서 언급한 태종 세종 문종이 충신의 표상으로 삼은 정몽주를 유학의 도통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성리학의 도통이란 언급이 전혀 없었고, 이색이 자기 문하(門下) 정몽주에게 칭찬의 말로 "유학의 비조"라고 했을 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문하(門下)의 정몽주를 칭찬한 말이었다. 이미 신라시대에서도 통치수단은 유학이었다. 물론 고려에서는 더욱 그랬다. 유학은 한자와 함께 이 땅에 들어 와 그 시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고 불교전래 보다 먼저다. 신라에서 설총에 의하여 학문으로 시작되어 신라 말 최치원에 의해 본격 도입되었다. 

 

 

조광조는 이색의 제자들 모두 정몽주 제자로 둔갑시키, 유학의 도통으로 ... 

 

성리학은 송말에 주자가 새롭게 기존 유학을 해석하여 막 붐이 일기 시작하던 시기로 송이 망하고 원이 들어서 정몽주 생존 시에는 성리학 붕아기에 해당한다. 정몽주가 원나라에  유학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를 유학의 도통으로 떠받드는 것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목은 이색의 행장을 보면, 원나라에 가서 직접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숭불이라는 국가이념의 제약 속에서도 유학의 진흥을 선도하며, 선현에 의해 수용된 성리학을 고려에서 비로소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풍토를 개척하였다고 되어있다. 태조(이성계)는 평소 이색에게 유종(儒宗)이라 칭하고, 목은 이색이 죽자 성균관에 배향하였다. 정몽주가 성리학의 도통으로 자리하게 하는 된 것은 조광조의 『정암선생문집』에서 기대승의 말을 인용하였으나 조광조가 만들어 낸 것이다. 

 

태종이 정몽주를  충신으로 내세운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목은 「이색의 묘지명」을 명나라 진연(陳璉)이 썼는데, 목은 이색을 헐뜬는 무리들이 묘지명에 쓰인 '용사자'란 단어를 트집잡아 해석하기를 "용사자는 태조 이성계"라고 태종 이방원에게 상소하여 태종이 노발대발하며 목은의 아들 양경공 이종선에게는 곤장 100대를 과하여 귀양보내고 목은의 제자인 권근 하륜에게는 관직을 삭탈하고 목은을 성균관 배향에서 철회하였다. 한편 『목은 문집』 70권 중 15권을 회수하여 불태웠다. 정몽주의 문집을 태종이 직접 명하여 간행한 것과 대조적이다.   

 

머리회전이 빠른 조광조(1482~1519)는 선왕들이 정몽주를 충신으로 내세운 것을 간파하고 이에 편승하여 훈구세력을 몰아내는 데, 정몽주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이여(李여)에 의하여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도록 유생들이 상소하였으나, 1510년 12월 21일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조광조가 또다시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자 이번에는 중종이 직접 나서 조광조를 편들며 반대자들을 비판하는 교서를 내리고 드디어 1517년 9월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도록 관철시켰다. 목은 이색이 성균관배향에서 철회된 후로 정몽주가 성균관에 배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목은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정몽주를 항상 앞에 놓는 등 유학에서 용인할 수 없는 처사까지 서슴치 않고 있으니 조광조의 심보가 어떠한가를 엿 볼 수 있다.

                                        

유학은 신라 설총으로 하여 고려 초 최충으로 이어지며 신유학인 성리학은 고려 중엽부터 안향 (1243∼1306) 백이정 권부 우탁 이제현 안축 이곡 이색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고려에 자리하게 된다. 그럼에도 당시 신출내기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삼은 이유는 앞서의 선왕들이 충신으로 내세웠으니 여기에 장단을 맞추려니 정몽주 앞의 선현들의 훌륭한 성리학 업적을 날려버리고,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후에 율곡은 유학의 도통문제를 제기하였다. 정몽주의 성리학에 대한 자료는 일체 없고, 오직 시 서너 수를 근거로 견강부회하는 것이다.

 

                                                            

                                                    소격소 철패   

 

 

소격소는 도교의 영향으로 조선초에 세워진 것으로 정5품의 관직을 받은 관리가 관리하는 만큼 중히 여겼다. 가뭄 천재지변이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이는 임금이 부덕한 소치라며,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곳이다. 조광조는 이는 이단이라하여 철폐하는데 그 철폐 연유가 참으로 기이하다. 

 

어는 날 소격소에세 제물로 사용할 소가 소격소 문턱을 넘자마자 죽는 일이 발생했다. 제물로 쓰는 소는 가장 건강한 소를 골라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조광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는 하늘이 더 이상 소격소를 유지하지 말라는 경고라며 소격소 철폐를 주장하여 결국 소격소를 철폐하기에 이른다. 멀쩡한 소가 문턱에서 죽다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소격소가 철폐된 후에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후, 중종의 어머니가 병으로 식음조차 못하는 백약이 무효인지라 중종은 하늘에 제라도 올리게하여 어머니의 병을 낮게 해달라는 간절한 뜻으로 소격소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믿을 수 없는 정몽주 묘 발견

 

정몽주는 선죽교가 아닌 자기 집 앞 태묘동에서 살해된 후,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일설에는 변계량이 수습하였다고도 하나, 문집 기록에는 1406 태종 6년 3월에 海豐郡에서 龍仁縣 曬布村으로 移葬하고 부인 李氏와 合葬하였다고 되어있다. 태종 6년이면 이미 정몽주 충신 만들기 작업이 시작되고도 오랜 시점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묘라고 발견된 것은 이자가 자기 선조 묘를 참배하러 가다가 무연고 묘를 발견하고 정몽주 묘라고 단정하여 상소를 올려 치제하고 사당을 짓도록 하였다. 지금의 용인시 모현동의 정몽주 묘가 그것이다. 정몽주 문집을 그대로 믿는다면 1406년에 그 부인과 합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그 부인의 묘는 합장이전까지는 관리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충신인 정몽주와 합장한 후로 적반하장 방치되어 80여년을 무연고 묘지가 되어 조광조와 이자의 고향 근처에서 발견되는지 전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가야할 것은 그간 전혀 모르고 있던 정몽주 묘가 발견된 시점, 발견 장소, 발견자 모두가 참으로 절묘하다. 조광조가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삼아, 훈구파를 척결하던 절묘한 시점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하늘의 조화가 아니면 조광조와 이자의 조화라고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다.

 

                                              조광조의 죽음

 

조광조는 하늘 끝을 확인하려는 듯, 분기탱천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고, 성희안(成希顔)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하여 반정하였는데, 이러한 류(類)의 반정 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공신 중에 2. 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 104명 중 4분의 3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반격을 야기 시켰다.

 

이에 훈구파들은 중종의 후궁 안빈 아버지인 홍경주를 비롯하여 남곤 심정이 주도되어 조광조의 도를 넘는 행위에 무사들이 조광조 일당을 처치하려 일어난다는 기미를 중종에게 알리니, 중종 또한 조광조에 의해 공신들을 제압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조광조의 도를 넘는 행태에 또 다른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무사들이 일어나면 결국 중종의 안위 또한 불안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중종은 과거 왕위를 노리는 사건이 발생하였기에, 한밤 중에 대신들을 비밀리에 비상소집시켜 조광조 일당을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광필이 이의를 제기하여 여러 차례 옥신각신한 끝에 조광조는 귀양보냈다가 드디어 중종이 1519년 12월 추운 겨울 날씨에 식어버린 진한 콜라 빛 탕재를 조광조에게 하사하니 4년 동안의 권좌에서 서른 일곱 살에 기묘사화라는 역사의 큼직막한 문패를 달고 조그만 지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 많은 이들이 함께 갔으나, 이자만은 면했는데 이자가 심정과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심정이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동행한 이자가 지극 정성으로 돌봐 살았다. 이러한 심정의 배려로 이자는 투옥되었다가 살아 남았다. 

 

한편 조광조의 죽임에 대해, 훈구세력이 궁녀를 시켜 나무잎에 꿀물로 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놓아 이를 벌레가 파먹게 하여, 벌레가 파 먹은 나뭇잎(走肖爲王)을 따다가 중종에게 바치고 趙광조가 왕이 되려한다고 모함하였다고 그럴 듯하게 주장하나, 이는 사실을 왜곡시켜 조광조의 죽음을 억울한 것으로 미화하려는 것이다. 허나 곤충이나 벌레의 생리를 전혀 모르고 지어낸 이야기로, 꿀을 먹는 곤충은 엽록체(잎)을 갈가 먹지 않는다. 반대로 엽록체를 갈가 먹는 곤충은 꿀을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고 설령 나뭇 잎을 파먹는다고 해도 글자대로 파먹지 않는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음력 12월인데 음력 12월이면 한 겨울이다. 한 겨울의 나뭇잎은 소나무나 잣나무를 제외하고 있을리 없고, 더군다나 곤충이 활동하며 잎을 파먹는다는 것은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말 할 수 없으며, 그걸 믿는 자 또한 이 사실을 모르고 믿는게 분명하다.      

 

                                         정몽주의 스승과 제자

 

조광조가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잡다보니 정몽주에게는 스승이 거론되지 않는다. 자신의 어머니라고 하기도 하나, 당시 여성이 성리학을 이해하고 가르쳤다는 것은 순도 100% 거짓이다. 정몽주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도 거짓이다. 여성이 시조를 지을 수 없던 시기였다. 근자에는 김득배를 스승이라고 주장하나 김득배는 정몽주가 과거 볼 때 지공거로 김득배의 문인(問人)이나 김득배로부터 성리학을 가르침 받은 스승이 아니다. 김득배는 성리학 계보에서 조차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정몽주가 처형당한 김득배의 신원을 복위시킨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정몽주의 스승은 나타나지 않는다. 신뢰할 수 없는 이들만 실기에 나온다며 등장할 뿐이다. 실기는 문집을 만들기에 부족한 내용을 후세들이 어것저것 모아 간행한 것으로 신뢰성이 문집보다도 떨어진다.

 

훗날 선조가 기대승에게 목은 이색이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을 때, 기대승이 답하기를 "충절은 목은 이색이고 성리학 도통은 정몽주"라고 답하였다. 기대승의 의도는 정몽주가 옛날에 "목은은 절조가 없다"고 한 말을 반박하여 절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고려의 충절은 목은이 으뜸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여기서 정몽주의 충절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면서 정몽주에게는 조광조에 의해 그동안 유학의 도통으로 떠받들어 왔기에 정몽주를 "유학의 도통"이라 답하였다. 후세가 조광조 문집을 만들면서 기대승의 말을 인용하여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규정하고 있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니 시간적으로 고증해 보면 정몽주의 성리학 도통은 서로 떠넘기기를 하면서 확고하게 자리하게 되는 아이러니다. 

 

즉, 조광조가 이미 도통이라고 주장하였기에 후세 기대승이 말 한 것을 조광조가 죽은 후에는 이를 기대승이 말했다고 조광조 문집에 기록하여 조광조가 정몽주를 도통으로 삼은 것을 정당화하고 있으니 북치고 장고치고 하는 행태로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조광조(1482~1519)와 기대승(1527~1572)의 생몰연대를 확인하면 조광조가 죽은 후에 태어난 기대승이 조광조 문집에 언급된다는 자체도 조광조 문집이 조광조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조광조가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삼은 이후로 목은의 제자들을 정몽주의 제자로 삼았기에 퇴계 이황, 기대승, 윤근수 등등이 천편일률적으로 인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광조 이전의 사료에는 정몽주 제자로 된 이는 목은의 제자이다. 

 

심지어 길재 제자인 박서생이 길재사후 3년이 지난 1422년에 쓴 길재의 행장과 길재 연보에는 驪興(여흥)의 부음을 듣고 3년 상을 치뤘다고 분명하게 기록 되어있다. 이는 목은 이색의 부음이다. 목은 이색이 驪興(현 여주)에서 죽음을 맞았기에 이렇게 기술하였음이 분명함에도, 이를 정몽주가 죽자 3년상을 치뤘다고 주장한다.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목은의 死地인 驪興의 부음을 정몽주 부음으로 둔갑시키는가? 이러함에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는 커녕 이를 가지고 정몽주 제자라고 호도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안향이 성리학을 이 땅에 도입하였고 권부가 주자의 서적을 가져와 간행하였고 그 후 목은이 원나라 한림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숭문관을 성균관으로 개창하고 초대 대사성(현 국립대 총장 내지 학술원 원장)에 취임하여 김구용 박상충 이숭인 정몽주를 겸임 학관(겸임강사)으로 선발하여 학문을 펼쳤다. 

 

 

정몽주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목은의 제자들이다. 그러니 정몽주의 단독제자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김자수 길재 권근을 정몽주 제자로 삼는데, 이는 조광조 출현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여말선초의 자료에는 이들 모두 목은의 제자로 나오는 자료들은 많으나, 정몽주 제자로 나오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정몽주가 지공거(과거 출제 위원) 로 뽑은 이들 문인(問人)을 제자로 삼는데 이는 성립될 수 없다. 성리학의 도통을 정몽주로 삼고 길재 김자수 김종직 이렇게 이어져 내려온다고 주장한다. 

 

길재는, 정몽주 정도전 이성계가 우왕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여 정몽주가 승승장구하며 수시중으로 있던 공양왕 2년에 벼슬을 버리고 유배 중이던 스승 목은 이색을 장단으로 찾아 와 자신의 거취를 말하고 의견을 물었다. 이색은 자신은 나라의 고관까지 지냈던 사람으로 혼란스런 나라를 나두고 은거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길재 너는 젊은 나이의 초급관료로 힘이 미치지 못하니 은거하여도 된다고 하였다. 길재는 그 길로 낙향하여 더 이상 출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정계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목은 제자로 길재와 함께 수학했던  정도전 권근 하륜의 증언에서 길재와 정몽주는 목은 제자로 되어 있다. 

 

김자수는 성균관 학업을 이수하고 장원급제하여 이색이 좌장이던 장원한 이들의 모임인 용두회의 젊은 총무로서 이색을 섬기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근자 육사출신의 하나회는 바로 이 용두회를 본따 만든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심광세의 단심가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민심을 잃을 대로 잃어, 충성심 결집에 정몽주를 적극 활용하였다. 일명 단심가는 정몽주 사후 225년 동안 어디에도 기록이 없었다. 1617년에 심광세가 어린이들이 무용하며 쉽게 내용을 익히도록 만든 노래책 『해동악부』에서 정몽주의 행동을 비판한 〈풍세악〉편 글 중의 일부로 정몽주와 이방원이 술을 나누며 노래했다는 한자로 된 문장이 나타난다. 그 후 42년이 지난 1659년 정몽주 문집을 새로 간행할 때, 정몽주 문집에 이를 게재하였다. 최근 간행된 문집에는 크게 앞 장에 게재하고 있다. 그 전에 이미 왕명으로 정몽주 아들과 유성룡 송시열 오운 등 조광조 이후 정몽주 추종자들로 하여금 정몽주 문집을 수차 발간하면서 정몽주에 관한 자료를 샅샅이 뒤져 심지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서찰까지 찾아내 보충하였고, 잘 못된 곳을 수정하는 등 정몽주 충신 만들기 작업에 심혈을 기우렸으나 그 유명한 ‘단심가’와 ‘하여가’는 물론 선죽교 사망설에 대하여 일언반구 없었다. 정몽주의 문집은 왕명으로 수차 간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가 다른 선현들에 비하여 내용면에서나 사상 면에서 뛰어나다고 주장하려면 필요이상의 전제를 동원하여야 한다. 현재 정몽주의 충신 아이콘인 단심가, 선죽교 및 정몽주 초상까지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는 연구결과가 있으며 본인 또한 이에 관심을 갖고 고증한 결과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숙종이 1693년에 齊陵과 厚陵을 참배하기위해 개성에 갔다가, 선조 3년에 정몽주를 배향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5년 지나 사액을 내린 崧陽書院에 가서 단심가를 읊었다.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치제문까지 내리고, 개성지역 유생을 공무원으로 선발하는 향시 이벤트까지 실시하였다. 그러니 이 단심가는 충성심을 결집하는 캠페인 송이 되었다. 급기야

심광세의 정몽주 비판 글이 반대로 정몽주를 만고 충신이라는 로고송이 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정몽주는 선죽교가 아닌 태묘동에서

 

정몽주가 자기 집근처 太廟洞 어귀에서 죽은 것을 善竹橋에서 죽은 것으로 날조하였다. 선죽교의 원래 이름은 選地橋였다가 선죽교로 개명되어 고려 후기인 우왕 14 (1388)년에  선죽교라는 명칭이 나온다. 정몽주 죽음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것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사 (공양왕세가) 고려사절요 동국사략 여사제강 동국통감 용비어천가 태조실록 정몽주행장 묘비 신도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일언반구도 없다. 그럼 선죽교 죽음설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선조 14년 (1581) 윤두수가 지은  成仁錄에 처음 나타난다. 윤두수가 어떤 근거에 의하여 이런 표현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윤두수의 선죽교 순절설은 그 당시나 그 후에도 오랜 동안 정몽주 자손이나 개성 인사들로부터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 후에 간행된 圃隱集이나 松都誌에 선죽교에 관한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조광조가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띄운 후, 윤두수로 부터 나왔다.

 

1740에는 영조(16)가 개성에 가 숭양서원에 賜祭하고, 善竹橋에 碑를 세우도록 명하였다그 후  영조33년 (1757) 吳遂采가 증보 간행한 松都續誌에서 정몽주의 선죽교 순절설이 기록된다. 史書에 정몽주의 선죽교 순절설이 기록되는 것은 영조 이후부터다. 安鼎福의 東史綱目 李兢翊의 연려실기술에 등장한다. 金正皞의 大東地誌에도 게재된다. 그 후 史書에 모두 등장한다. 그 앞서 수차례 정몽주 문집을 간행하였으나 이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영조 45(1769)년에서야 이 내용이 정몽주문집에 게재된다. 

 

정조는 1780년에 정몽주 후손 정호인을 개성 유수로 임명하여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은 것으로 확고히 하기 위해 妙覺寺址에서 석재를 가져다 선죽교를 개축하고, 성역화 하여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다. 사람들이 이곳을 지낼 때는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였다며 없던 하마비까지 세웠다. 그리고 철퇴 맞아 순절할 때 흘린 피 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고 퍼트렸다.  

     

                                  정몽주가 유학의 도통으로

 

처음으로 안향의 시문집『회헌실기』가 간행된 것은 안향(1243∼1306) 사후 460년만인 영조 42년(1766) 에서야, 죽계서원에서 간행하였다. 1764년에 서문을 쓴 사람은 이정보(李정輔), 박성원(朴聖源), 송명흠(宋明欽) 3명인데, 이정보만이 유학의 도통을 정몽주로 썼다. 얼핏 보면 안향이 고려 때 인물이기에 이 주장이 고려에서 이뤄진 것으로 생각하면 잘 못이다. 

두 번째 간행 1816년 서문에 홍석주(洪奭周)가 '안향 .., 이익재 우문희 등 여러 사람이 뒤이어 일어나 모두 주자를 추종하여 존숭했고 포은 정문충공에 이르서...'라고 썼고, 3차 간행 1882년 서문에 소휘면(蘇輝冕)이 성리학 체계를 올바르게 제대로 열거했으며, 김상현(金尙鉉) 서문에는 정몽주 언급이 없다. 4차 간행시 1909년 11월의 이만도(李晩燾), 정재규(鄭載圭) 서문에 정몽주 언급이 없다. 안향은 정몽주가 태어나기 30여 년 전에 죽었다. 사후 460년 만에 실기를 내었는데, 이때는 이미 조광조에 의해 정몽주를 성리학의 도통으로 받든 이후로 이정보가 쓴 서문이다.  참고로 실기는 문집에 비하여 그 신뢰성이 떨어진다. 물론 문집도 고증된 사실이 아니라 후손 내지 후학들이 내는 것으로 대부분 미화되는 것이 통례다.

 

강효석(姜斅錫)은 1924년 한양서원 (漢陽書院) 에서 『전고대방(典故大方)』을 간행하였는데, 앞의 회헌실기 서문을 쓴 이정보의 주장에 따라 정몽주를 유학의 도통으로 삼아 열거식으로 일목요현하게 만들었고, 장지연, 고려대 초대 학장을 지낸 현상윤, 고려대 전신 출신 이병도  역시 조선유학의 연원을 쓰며 고려사 등의 원전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기대승 조광조 이황의 말에 따른 강효석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들은 권근 까지도 정몽주의 제자로 삼고, 이색의 학문이 이어지지 않고 끝 난 것으로 만들어, 정몽주를 앞세웠다. 원래 이색의 학문은 권근 하륜으로 이어지고 김종직에 이르게 된다. 이 책에서는 유학의 계통을 엉터리로 기술하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유학계에서 금과옥조로 인용되며 유학사의 근간이 되고 있다. 

 

유학, 사학 심지어 국문학에서 이름이 알려진 교수도 1차 자료를 철저히 연구하지 않고 2차 3차 자료를 복사하여 글로 썼기에 오류가 밝혀지자 오히려 정몽주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별의별 괴변을 늘어놓는다. 스승과 제자가 있어야 학문이 이어지는데 성리학을 정몽주가 창시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몽주가 성리학의 발상지에서 연구하고 돌아와 고려에 전파한 것도 아닌데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스승과 제자가 없다. 이색의 제자인 야은 길재를 정몽주 제자로 둔갑시킨다. 정몽주는 은둔생활을 하지 않고 햇볕을 찾았기에 당연히 저술이나 싯구를 지을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입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기술하고있으나, 조선에서 이방원을 비롯하여 많은 왕들이 정몽주의 글을 찾아 문집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음에도 문집으로서 초라할 뿐이다. 성리학의 대가라는 고려대 전교수 윤사순은 목은의 성리학 도입에 대한 근거에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목은이 성리학을 완전히 이해하였다는 증거가 없다며, 윤사순은 자신이 써논 글에 책임을 회피하려는지 괴변으로 소설을 쓰며 정몽주 문집에 나오는 "《<古川一鄕士論》에서 〈讀易寄子安大臨兩先生〉ㆍ〈讀易〉ㆍ〈冬至吟〉 ㆍ〈浩然卷子〉 詩를 性理에 관한 詩篇으로서 東方 理學의 시조로 추대해도 마땅 "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몽주가 성리학을 어떻게 혼자서 완벽하게 이해하였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또한 김자수가 정몽주의 제자라는 것도 조광조 출현 후부터 나타날 뿐 그 이전에는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나중에 책(주자)을 구하여 대조하여 보니 정몽주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정몽주는 원나라에 유학하지 않고 오히려 명나라를 오가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며 자기들 잘 못을 변명하지만, 정몽주가 어떻게 주자의 책을 보지 않고 주자의 책과 똑같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이색이 한 때 자기 문하인 정몽주의 바른 견해를 칭찬한 말에 불과하다. 또한 정몽주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출장간 적이 있으나, 어떻게 정몽주가 명나라에 출장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는 것인지? 일반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 없으니 그대로 믿는다.

 

정몽주가 출장 갔을 때, 명의 비협조로 출장 업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어떤 경우는 입국조차 못하고 국경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학문한 것과 연계하여 주장하고, 단심가를 염두에 두었는지 정몽주의 의리를 명분 삼아 성리학의 도통으로 기술 한다. 정몽주의 초상화는 처음 세종 명에 의하여 충신의 모습으로 그려졌고, 그 후 조선말기 화원화가 이한철(1808-1880 이후) 이 그렸으나, 모두가 정몽주를 구경조차 못 했던 이들로 거짓 정몽주 얼굴이다.  최근에는 알 수 없는 정몽주의 초상이 고려 공양왕을 추데한 공로로 기렸다는 정체 불명의  정몽주 추상화를 국가 보물로 지정한 것을 보고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당시 정몽주의 초상화가 존재하였다면 세종대왕은 왜 그 초상화를 이모하라 지시하지 않고 충신의 얼굴로 그리라고 명하였으며, 지금 지정된 초상화는 어찌하여 세종이 명하여 그린 것과 일치하는 가 말이다.

 

학문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이는 정몽주를 추켜세우고, 다른 고려 선현들의 선행을 적반하장 악행으로 기술하는 불량 기질까지 서슴없이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모임지에 쓰고 있다(전 건국대 교수 신복령의 경우). 이러한 우매한 행위는 문헌비판을 하지 않는 결과이다.

 

본인도 어릴 적에 단심가를 외우며, 선죽교에 핏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며 정몽주 충신론을 귀가 절절하도록 들어 그렇게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이들이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헌종 때에 선죽교 사망설의 허구가 제기되고, 日人에 의하여, 개성 박물관관장이던 고유섭에 의하여, 근래에는 『대구사학』  제15집 1978, 경북대 문경현  교수의 <정몽주 순절처의 신 고찰> 이란 논문에서 선죽교 사망설이 날조되었다는 입증자료와 정몽주의 절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무려 45면에 걸쳐 쓰고 있다. 이에 대해 부산대학교 이재호 (전)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사의 비정(批正) (1985년, 우석출판사)'에서 그리고 고려대 (전) 교수 김충렬은 한국사상사학회 학회지 3집(1990.12.30)에서 문헌상의 고증이 아니라 조선에서 정몽주 충신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후에 나타나는 송시열의 글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주장하고 있으나 논리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며 두문동 72현을 들먹이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또한 일인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었다는 해괴한 말을 이어가며 문경헌 교수의 논문을 비판아닌 비난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오히려 朝鮮總督府가 昭和 7년 (1922)에 간행한 普通學校 國史(1)에서 왜놈의 역대 왕들을 기술하고 조선인으로는 오직 이성계와 정몽주를 언급하며,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와서 일년간 체류하며 일본에 협력하였다는 내용을 실으며 정몽주를 위인으로 추켜 세웠다. 이런 정몽주를 일인들이 비난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제대로 연구하고 주장하는 말인지 한심하기 그지 없다. 바로 이들이 식민사관의 골수자들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단심가와 하여가도 정몽주와 이방원의 작이 아닌 심광세가 쓴 것이다. 이처럼 정몽주가 고려 충신으로 주장되는 실체들은 대부분 날조되거나 사실과 다르다.

여기서 본인은 정몽주의 사생활은 삼가하기로 하였다. 불미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정몽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성계 일파의 충신이었으며, 유감스럽게도 일제가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정몽주를 앞세워 일본 식민지를 합리화 시키는 인물이 되었다. 정몽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성계의 충신이었고, 심지어 일제강점기시에는 일본에 협력한 인물로 활용하였다.

                                                   

                                                  한국의 인문학자

 

본인이 의혹을 가지고 있던 사실들이 이미 소수 학자에 의하여 언급되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럼에도 이들 주장이 확산되지 못한 것은 연구 내용이 잘 못된게 아니다. 세력가(권력 내지 학계)에 빌붙어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발표함으로서 기득권에 편승하였다. 자신들의 연구 내지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되어도 이를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초에 나타난 문헌비판은 설자리를 못찾으니, 진정한 역사연구는 요원하다. 문헌비판을 거쳐야 올바른 역사를 기대할 수 있는데, 패거리 풍토에서는 문헌비판이 자리할 수 없음이 통탄스럽다. 신진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미셸 푸코의 계보학 이론이 소개되고 있으니 그나마 기대를 걸어 본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계보학 시사점

  

프랑스 철학자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년 10월 15일 ~ 1984년 6월 26일)는 어떤 지식도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권력과 지식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관계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권력을 정당화하는 지식은 물론이고 저항하는 지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어떤 지식이 진리라 인정받았다면,그 자체가 가진 정교함이나 객관적 확실성 때문이 아니라 그 지식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정치적 효과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몽주의 재평가를 미셸 푸코의 계보학의 주요 쟁점을 인용 제시함으로서 조선에서 정몽주를 내세운 시사점을 찾아 볼 수 있다.    

 

푸코는 이념적 주제, 멋 있는 주제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영합주의는 큰 죄를 짓는 것이며, 시작과 끝이 멋있는, 폼나는 이야기는 수상한 역사로 누군가 조작한 냄새가 난다. 사회 전체를 한 눈에 관망하여, 기존 역사가들의 연구, 특히 해석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파고 들어가서 현실을 탐사해야 한다. 구름층과 땅바닥을 구별하고 땅바닥을 혀로 핥듯이 탐사하고 다시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외관의 사건의 진행이 현실의 끝이 아니다. 당사자들, 동시대 사람들의 경험, 느낌, 그리고 그들이 부여하는 의미 등의 내면을 탐사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의미의 다양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중시했다. 의미란 내면의 일이다. 기존의 해석을 경계하여야 하며, 특히 찬양을 경계하하라고 한다. 다른 시대를 관찰하면 기존의 연구 대상은 사회의 전혀 다른 분야에서 발견될 수 있고, 명칭도 달라질 수 있고,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연구 프로젝트의 대상도 역사의 시야를 확대하면 명칭을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으며, 연구의 대상을 분해해서 보는 경우, 각 부분은 다른 역사적 발전 경로를 따라 왔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한다.

 

계보학적 연구는 과정에서 미로를 헤맬 수도 있다. 계보학적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별 걸 다 알아야 한다. 그리고 헤맬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한다. 잘 된 계보학 연구는 역사적으로 하찮은 기술, 속임수, 재주 등이 예상치 못하게 엄청난 규모로 발전하여, 위대한 기술, 제도 등으로 변모하여 역사와 인간의 삶에 심오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계보학은 아주 도식적으로 말하면 몸에 이상이 있을 때 병원에서 MRI를 찍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몸 안에 환부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대되어 왔는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야은 길재가 정몽주 제자인지 이색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있으니, 판단하는데 참조하기 바란다.

 

 

[‘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⑪|해평 길씨와 길재]



 
2006.01.03 517 호 (p 78 ~ 79)  
[‘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⑪|해평 길씨와 길재]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고려 멸망 2년 전에 낙향 … 성리학 학통 이으며 조선 사림의 씨앗 뿌려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구미시 도량동 밤실 사당에 있는 길재의 신위와 초상화.
고려 말을 대표하는 충신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꼽는다. 여말 3은인 이들은 두문동 72현에 들지만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고려 말의 충신 집단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길재(1353~1419)는 고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1390년(공양왕 2년) 봄에 낙향했다. 그의 나이 38세로 벼슬은 종사랑(從事朗) 문하주서(門下注書)였다. 종칠품이었으니 나이에 비해 한미한 직급이었다. 낙향의 명분은 “고향에 계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고려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는 길에 황해도 장단현에 살던 이색(1328~96)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의 전경을 이색은 ‘목은집’에 남겨두었다.
“경서에 능통한 태학의 선비/ 귀밑털 새파란 급제(及第) 주서(注書)가/ 가족을 이끌고 고향 가면서/ 내 말을 듣자고 거듭 다지네/ 글을 읽으면 옛사람 따라갈 거고/ 책(策) 지으면 조정에 오를 걸세/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나.”
영조 때 길재의 충절과 학덕 기려 채미정 건립


길재의 묘소 앞쪽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주중류비가 있다.
이색은 젊은 길재에게 기러기를 가리켰고, 그 기러기에 마음을 실은 길재는 경상북도 선산에 위치한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인(金烏山人)이 되었다.
지금은 구미가 선산보다 커서 구미시 선산읍이지만, 1978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안에 있는 구미읍이었다. 금오산도립공원 어귀에는 채미정이 있다. 길재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됐다. 중국의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던 고사에서 빌려와 ‘채미정(採薇亭)’이라 이름 지었다.
채미정 아래 지금의 금오산 저수지에는 길재를 홀로 배향하는 금오서원이 있었다. 금오서원은 1570년에 건립돼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이 됐고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렸다. 1602년 복원되었는데, 위치를 많이 옮겨 선산읍에 가까운 낙동강과 감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는 선산읍이 선산의 중심이었고, 선산의 선비들이 서원을 많이 출입했기에 그들의 편의를 위해 옮긴 것이었다.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길재의 영향 때문이다. 그 씨앗은 채미정에서 뿌려졌다.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선산 사람인데, 12세 때부터 길재에게서 ‘소학’과 경서를 배웠다.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주었고, 이 학통은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정붕(鄭鵬)·박영(朴英)을 거쳐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으로 내려가면서 거대한 영남 사림파를 형성하게 된다. 조선 중기 사림파의 뿌리는 길재에게서 비롯됐고 선산에서 싹텄다.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고려 멸망 2년 전에 낙향 … 성리학 학통 이으며 조선 사림의 씨앗 뿌려
 
 




길재가 11세 때 들어가 공부했던 도리사.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금오산 자락에 있는 채미정. 길재의 고향 마을에 세워진 삼강정려각 안의 비석(왼쪽부터).
길재가 살던 봉계리(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마을 어귀에는 그를 기린 삼강정려각이 있다. 삼강정려각에는 봉한리 출신의 충신 길재, 효자 배숙기(裵淑綺), 조을생(趙乙生)의 처로 열녀 약가(藥哥)의 비와 현판이 있다. 봉한리 마을 안쪽, 죽림사 위쪽에는 근자에 건립한 길재 유허비가 있다. 길재는 외가 동네인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길재가 여덟 살 때 이 동네에서 가재를 잡다가 지은 시가 있다.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도 어미 잃었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은 알지만/ 네가 어미 잃은 것이 내 처지와 같아/ 너를 놓아주노라.”
이색·정몽주 등에게서 학문 배워
길재는 11세 때 냉산(지금의 태조산)의 도리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도리사는 신라 불교가 처음 싹튼 곳으로, 아도화상(일명 墨胡子)이 수행했다는 좌선대가 있는 곳이다.
길재는 18세 때에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찾아 개성으로 갔다. 그는 개성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배우게 된다. 길재는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권근은 “내 뒤를 이을 학자는 몇 있을 터지만 길재보(再父는 길재의 자)가 독보(獨步)다”라고 했다.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은 보성대판과 금주(지금의 충남 금산)지사를 지냈다. 길재와 금산의 인연은 1383년에 길재가 금주지사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31세로 노총각이었다. 길재는 그곳에서 중랑장(中郞將·정오품 벼슬의 무관) 신면(申勉)의 막내딸과 혼인하게 된다. 신면은 현재 청풍사(淸風祠)가 있는 곳에서 2km가량 떨어진 토골에서 살았는데 땅을 많이 소유한 부호였다.
길재가 혼인한 이듬해에 아버지 길원진이 근무지인 금주 관아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길재는 아버지를 고향으로 모셔가지 못하고 관아에서 장례를 치렀고, 묘소도 금산에 마련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 앞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지냈다. 불교식 장례가 널리 행해지고, 길어야 백 일이면 탈상하던 시절에 ‘주자가례’에 따른 것이다.
현재 해평(海平) 길씨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충남 금산인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해평 길씨 집성촌에 가면 길재를 기리는 사당 청풍사가 있다. 동네 이름이 부리면 불이리로, 발음이 같은 단어가 중복되어 있다. 부리(副利)는 삼한시대 때부터 전해오던 지명이고, 불이(不二)는 불사이군(不事二君)에서 따온 말이다. 길재가 살던 마을이라, 길재의 불사이군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런 지명을 조선시대에 붙였다.
야은 길재는 고려의 충신이지만, 조선 왕조와 선비들에 의해 시대의 충신이자 효자로 추앙받았다. 조선의 통치이념이 된 성리학을 투철하게 실천했고, 조선 사림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받은 대접이었다. 길재 개인은 고려에 충실했지만, 그의 정신은 조선의 충실한 표본이 된 것이다.

 

 

 

 

  

출처 : 安 喩 齋
글쓴이 : 安喩齋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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